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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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그륵
청람 김왕식
정일근 시인의 「어머니」를 읽으며, 첫 문장에서 발이 붙들렸다.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정확한 표기보다 정직한 숨결, 사전보다 삶 가까운 언어. 그 한 마디 속에 어머니의 세월이, 눈물이, 사랑이 고여 있었다.
‘그륵’. 사전 어디에도 없는 말. 학교에선 ‘그릇’이 맞다고 배웠고, 글쓰기를 업으로 삼으며 늘 올바른 말만 고르려 애썼다. 하지만 정일근 시인의 그 한 줄은 사전보다 더 깊었고, 어머니라는 존재보다 가까운 설명은 없었다.
어머니는 늘 ‘그륵’을 꺼내셨다. 들에서 돌아오면 물 한 그륵, 감기 든 아이에게는 미지근한 물 한 그륵, 그리고 가끔은 조용한 위로 한 그륵. 그 말에는 힘겨운 날들을 견뎌낸 체온이, 소리 없이 건넨 사랑의 깊이가 스며 있었다.
그릇이란 말보다 먼저, 삶이 만든 발음. 자음 하나 틀려도 그 말은 단단했다. 모국어의 뿌리는 사전이 아닌 생이다. 그 발음 하나로 밥상이 차려지고, 하루가 버텨졌다.
시인은 고백한다.
“두툼한 국어사전을 옆에 두고 시를 쓰는 내가 부끄럽다.”
그 말 앞에 오래 머물렀다. 삶은 말보다 앞서고, 시는 그 삶을 되짚는 언어여야 하는데, 언어의 틀에 갇혀 사랑의 발음을 외면한 적은 없었는지.
‘그륵’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기록되지 않았을 뿐, 사랑 속에서 가장 정확히 쓰였던 언어였다. 그릇은 물건이었지만, 그륵은 마음이었다.
정일근 시인의 어머니가 남긴 시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말은 그대로 시였고, 발음 자체가 시였다.
이제 시를 쓴다는 것, 말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 말을 살게 했던 사람들의 체온을 껴안는 일임을 알겠다.
오늘, 그 소리 다시 불러본다.
그륵.
그 말 안에서 식었던 국이 다시 데워지고, 잊혔던 손등이 다시 따뜻해진다.
알겠다. 어머니는 언어를 고치지 않으셨고, 그 언어가 나를 고쳐주고 있었다는 것을.
―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