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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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N 자연인 544 회 ㅡ 트럭운전사 안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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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예술관
— 트럭운전사의 눈으로 본 세상의 숨결
자연인 트럭운전사 안최호
예술은 갤러리에만 걸려 있는 게 아니다. 악보에만 적혀 있는 것도, 시집에만 묶여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언제나 길 위에 있다. 아스팔트를 달리며 매일 보는 세상은 끝없이 펼쳐진 캔버스고, 끊임없이 연주되는 생명의 교향곡이다.
새벽 여명, 시동을 거는 순간 하루의 무대가 열린다. 핸들 위에 얹힌 두 손은 곧 지휘자의 손처럼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바퀴가 아스팔트에 닿으며 내는 소리는 저마다의 선율을 만들어낸다. 그 소리는 똑같은 길을 달려도 다르게 들린다. 먼지를 품은 타이어의 울림은 어떤 날은 첼로 같고, 어떤 날은 북소리 같다. 거친 듯하면서도 묵직한 그 울림은 가슴속 어딘가를 흔들어놓곤 한다.
옆 차선에서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굉음도 예술의 일부다. 트럼펫처럼 날카롭다가도 금세 멀어지는 그 소리는 길 위의 퍼포먼스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앞서 가는 차들을 보며 나는 종종 생각한다. 저 사람은 어떤 사연을 싣고 어디를 향해 달리는 걸까. 그런 상상 속에서 소설이 피어나고, 그림이 떠오르고, 마음엔 작은 시 하나가 깃든다.
신호등 앞에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면, 전깃줄 위에 앉은 까마귀, 전봇대 아래서 재잘대는 참새들,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는 바람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순간 나는 단지 운전사가 아닌, 자연과 잠시 눈을 맞추는 관찰자가 된다. 아무런 말 없이 건네는 그 존재들의 움직임이, 어떤 오케스트라보다 웅장하게 다가온다.
노을 지는 아스팔트를 달릴 때면, 붉은빛이 트럭 유리창에 번져온다. 그 빛은 물감처럼 퍼지고, 하루의 전시회가 조용히 끝나간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마시는 커피 한 모금, 그리고 정면에 펼쳐진 하늘의 풍경은 세상 어떤 명화보다 깊은 감동을 준다. 누구는 그냥 하늘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 속에서 하루의 이야기와 내 마음을 발견한다.
가끔은 나비 한 마리가 불쑥 시야를 가로지른다. 현실은 무겁고 촉박하지만, 그 가벼운 날갯짓 하나에 나는 주춤하며 멈춰 선다. 화물의 무게와 시간에 쫓기는 일상 속에서, 나비는 잠시 내게 삶의 본질을 묻는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있는가.
나는 이 모든 풍경을 붓으로 그리거나, 시로 써내지 않는다. 다만 운전하면서 내 시선으로, 감각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느낀다. 그게 나만의 예술이다. 창조라기보다 감응이고, 말보다 침묵이 더 중요한 예술이다.
내가 달리는 길은 지도 위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한 줄의 긴 시이고, 끝나지 않는 교향곡이며, 흐름 속에서 진동하는 생의 아리아다. 나는 오늘도 새벽을 가르고 달린다. 눈앞의 도로는 한없이 펼쳐진 백지고, 그 위에 아스팔트 붓질로 삶을 그려 넣는다.
예술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트럭의 진동 속에,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속에, 매일 지나치는 신호등 뒤편에도 있다. 그 모든 찰나들이 모여, 내 마음엔 매일 새로운 세상이 태어난다. 예술은 결국 그렇게, 길 위에서 피어난다.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ㅡ새벽을 깨우는 남자
트럭운전사 자연인 안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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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발견한 생의 시학
― 자연인 안최호 작가의 「길 위의 예술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트럭운전사의 삶은 흔히 '노동'과 '생계'라는 말로 규정되기 쉽다. 자연인 안최호 작가는 그 속에 깃든 생의 결을 예술로 끌어올린다.
그의 글 「길 위의 예술관」은 단순한 운전 일지나 소박한 감상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진동에서 우러난 철학이자, 달리는 삶 속에서 길어 올린 고요한 시학이다.
이 글은 본질적으로 ‘움직임 속의 명상’이다. 도로 위를 흐르는 트럭의 바퀴 소리를 ‘아스팔트 붓질’이라 표현하는 순간, 독자는 이미 물리적 세계를 벗어나 미적 지각의 공간으로 진입하게 된다. 안 작가는 이 속도와 진동의 감각을 캔버스 위의 색채처럼 포착해 낸다. 소리, 풍경, 공기의 결—all that passes by—is not just passing, but painting.
작가는 굉음조차도 트럼펫처럼, 먼지마저도 바람의 음표처럼 받아들인다. 이처럼 불협조차 하모니로 감각하는 태도는, 비판이나 회피가 아닌 ‘수용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동양적 무위(無爲)의 정서와도 통한다. 세상을 억지로 해석하려 하지 않고, 그저 길 위를 지나는 모든 것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바로 삶 자체를 예술로 수용하는 진정한 ‘자연인의 철학’이다.
특히 감동적인 대목은 황혼을 '하루의 전시회 마지막 장'이라 표현한 부분이다. 이는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재료를 빚어낸 작가의 미감이다. 안 작가에게 하루는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창작되는 것이며, 그 끝은 피날레가 아닌 또 다른 시작의 여백으로 남는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을 통해 ‘존재의 시학’을 사유하는 장면은 글의 백미다. 무거운 화물과 가벼운 나비의 대조는, 생존과 존재, 기능과 의미, 목적과 우연이라는 근본적 긴장을 메타포로 압축한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독자는 비로소 깨닫는다. 예술은 박물관의 전시품이 아니라, 바퀴 소리와 나비 날갯짓이 교차하는 그 ‘삶의 도정’에 있다는 것을.
안최호 작가의 문장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 담백한 언어 속에는 매일의 수고와 침묵이 녹아 있다. 그는 시를 쓰지 않지만 그의 시선은 시를 짓는다.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지만 그의 관조는 장면을 만든다. 예술은 멀리 있지 않다고, 그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다. 그 조용한 확신이 이 글을 더욱 깊고 빛나게 한다.
이 글은 트럭이 달리는 만큼의 거리만큼 독자의 마음을 밀고 나간다. 느리지만 강하게. 시끄럽지 않지만 오래 남게. 바로 그 점에서, 「길 위의 예술관」은 일상의 예술, 생의 미학, 그리고 노동의 시학을 정제된 메타포 속에 고요히 풀어낸 걸작이다.
그의 삶 자체가 곧 한 편의 시이며, 그 길 위에서 매일 쓰이는 예술이다. ㅡ 청람 □
안최호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