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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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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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낸 자리
시인 변희자
한 잔의 차를 들고
말없이
마음을 가만히 앉힌다
말끝을 스쳐간 고요가
찻잔 속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숨결 같은 것을 어루만진다
한 모금, 두 방울
가라앉은 생각을 떠올리자
적막한 기쁨들이
나직이 숨결을 고른다
찻잔의 따뜻함과
고요와 함께한 순간을
살며시 되새기며
비워낸 자리엔
살짝 깊은 공기결이
고운 향으로
위로의 안부를 건넨다
■
비워낸 자리에 피어오른 차향처럼
— 변희자 시인의 「비워낸 자리」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변희자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문장 너머에 놓인 고요함이 먼저 말을 건다. 「비워낸 자리」 역시 그런 작품이다. 이 시는 화려한 수사나 과장된 정념 없이, 찻잔 하나에 담긴 삶의 미학과 내면의 평화를 소박하게 담아내고 있다. 시인은 삶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깃든 섬세한 ‘비움의 미학’을 조용히 받아 적는다.
첫 연에서 ‘한 잔의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닌, 마음을 내려놓는 의식의 도구다. ‘말없이 / 마음을 가만히 앉힌다’는 구절은 육체적 동작을 넘어 정신적 앉힘, 곧 자기 성찰의 자세를 의미한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다. 차의 온기를 통해 시인은 내면의 숨결, 즉 고요와 마주하는 법을 배운다.
‘말끝을 스쳐간 고요’는 절제된 시인의 언어 감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라진 말 너머에 있는 정적, 그 침묵을 시인은 찻잔 속에 담긴 숨결처럼 어루만진다. 물리적 비움이 아닌 정서적 정화의 과정을 시는 담담히 추적하고 있다.
이 시의 미덕은 ‘생략’에 있다. 시인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한다. ‘한 모금, 두 방울’로 표현된 감정의 움직임은, 애써 흘리지 않은 눈물의 무게처럼 절제되어 있다. ‘적막한 기쁨’이라는 상반된 어휘의 조합은, 고요함 속에서 피어오르는 깊은 기쁨의 내밀한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마지막 연. ‘비워낸 자리엔 / 살짝 깊은 공기결이 / 고운 향으로 / 위로의 안부를 건넨다’는 구절은 이 시의 철학적 정수다. 채움보다 중요한 비움, 비워졌기에 오히려 충만해지는 공기, 그 안에서 스며드는 위로와 향기. 이는 시인의 삶의 태도를 은유하는 시적 진술이다.
변희자 시인은 세상을 요란하게 해석하지 않는다. 조용한 눈빛으로, 찻잔 속 물결 하나를 오래 응시하며 삶의 결을 읽는다. 이 시는 다정한 절제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며, 그녀를 ‘사임당 시인’이라 부르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는 삶의 한 귀퉁이에서 피어난 들꽃처럼 조용하지만, 그 향기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