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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마음에 물 주는 일 ― 청람 김왕식

김왕식 문학평론가 ㅡ 김철삼 연세대 경제대학원 객원교수








문학은 마음에 물 주는 일
― 문학이 삶에 미치는 영향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학은 삶에 물을 준다. 바짝 마른 마음에 조용히 스며드는 한 방울의 물처럼, 말라가던 감정의 뿌리를 다시 숨 쉬게 하는 일이다.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도, 속은 종종 갈라진 논바닥처럼 금이 가 있다. 문학은 그 틈을 발견하고, 그 틈에 물을 붓는다.

요즘은 모두가 바쁘다. 하루하루가 마치 열차처럼 달려가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한 줄도 생각할 틈 없이 어딘가에 도착해 버린다. 그렇게 ‘사는 데’ 집중하다 보면, 정작 ‘나’는 어디쯤 오는지 잊기 쉽다. 그때 문학이 조용히 손을 내민다. “괜찮니?”라고 묻는 다정한 문장 한 줄. 그것이 바로 문학이 삶에 닿는 방식이다.

문학은 길가에 핀 민들레처럼 다가온다. 누구나 쉽게 밟고 지나칠 수 있지만, 다시 돌아보면 거기서 가장 순한 위로가 피어 있다. 그것은 말로 누군가를 이기려 하지 않는다. 대신 말없이 옆에 앉아, 오래도록 들어주는 힘이 있다.

때때로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안고 살아간다. 이유 없이 가라앉는 날, 도무지 풀리지 않는 슬픔, 웃고 있지만 허전한 마음. 그럴 때 문학은 등 뒤에서 조용히 다가와 말해준다. “나도 그런 날이 있었어.” 그렇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문학은 마음의 온도를 바꾼다. 겨울날 주머니 속 핫팩처럼, 소리 없이 따뜻함을 전한다. 그것은 병을 고치지 않지만, 견딜 힘을 준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지만, 감당할 마음을 키워준다. 마치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는 것처럼, 혹은 눈 오는 밤, 촛불 하나를 건네는 것처럼.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삶을 통해 내 마음의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다. 누군가의 문장에서 내 마음의 조각을 발견하고,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고 안도하게 되는 경험. 그것은 아무도 몰랐던 내 안의 울음을 대신 흘려주는 일이며, 오래 묻어둔 말 한 줄을 조심스레 꺼내는 일이기도 하다.

문학은 빠르지 않다. 오히려 느리다. 그래서 좋다. 세상은 자꾸 재촉하지만, 문학은 “천천히 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준다. 삶이 버겁고, 마음이 지칠 때, 문학은 그늘이 되어준다. 그 그늘 아래서 우리는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다시 걷는다.

문학은 삶의 문제를 풀어주는 열쇠가 아니다. 하지만 마음을 다시 열게 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단단히 잠겨 있던 창문을 슬며시 열고, 바람 한 줄기를 통하게 해주는 힘. 그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는 데 익숙하지만, 살아내는 데는 서툴다. 그럴 때 문학은 말해준다. “괜찮아, 네가 느끼는 건 당연한 거야.” 그렇게 말 한 줄로 마음 한 모서리가 풀리는 순간, 삶은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단단해진다.

그래서 나는 문학을 믿는다.
문학은 삶을 고치지는 않지만,
삶을 껴안아줄 줄 안다.

문학은 상처를 지우지는 않지만,
그 상처에 새살이 돋을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문학은 길을 알려주진 않지만,
혼자 걷는 밤에 곁을 내어준다.

그래서 문학이 있는 삶은,
비 온 뒤 흙내 나는 들판 같고,
햇살이 번지는 골목 같고,
조용히 등을 토닥여주는 손 같다.

문학은 우리 삶에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오래 머물러준다.
그리고 그게 우리를 살린다.



ㅡ청람 김왕식





□ 김철삼 연세대 경제대학원 객원교수






문학은 사람을 살린다
— 청람 김왕식 평론가께 드리는 편지




김철삼 연세대 경제대학원 객원교수




청람 평론가님,
깊은 울림으로 가슴을 적셔온 한 편의 글, '문학은 마음에 물 주는 일'을 읽고 난 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 글은 생의 갈피마다 말라 있던 마음의 틈새에 조용히 스며드는 문학 그 자체였고, 한 줄 한 줄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습니다.
저는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수치와 논리가 삶의 언어인 세계에서 살아왔지만, 오늘 이 글을 통해 문학이야말로 인간의 고통을 감지하고 위로하는, 가장 오래되고도 은밀한 치료임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청람 평론가님은 문학을 ‘한 방울의 물’에 비유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비유를 넘어 삶의 본질을 관통하는 진술이라 느꼈습니다. 우리 시대는 점점 더 속도를 요구하고, 감정보다는 기능을 앞세우며, 살아 있는 사람마저 소비되는 존재로 다뤄지는 시대입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문학은 늘 변두리에 밀려나 있는 듯 보이지만, 바로 그 변두리에서 사람의 진짜 중심을 어루만지는 힘을 지녔다는 것을 이 글은 강변하지 않고, 다만 조용히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지닌 가장 큰 위엄이 아닐까요.

‘괜찮니?’라고 묻는 문학의 다정한 한 줄, ‘천천히 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문장의 숨결은, 때때로 어떤 정책보다 더 깊은 회복의 길이 됩니다. 평론가님은 그 사실을 꾸밈없이, 그러나 절절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문학은 삶을 고치진 않지만, 삶을 껴안아줄 줄 안다’는 구절에서는 저는 잠시 책을 덮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 한 문장은 살아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미화하지 않고, 삶을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끝내 사람을 믿는 문학의 윤리를 청람 평론가님의 문장 안에서 읽었습니다.

경제학의 세계에서도 문학이 필요합니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사람의 속사정, 계량할 수 없는 상처의 깊이, 설명할 수 없는 회복의 온도는 결국 문학이 오래도록 지켜온 영역입니다. 사회는 시스템으로 굴러가지만, 인간은 이야기로 살아갑니다. 문학은 그 이야기들을 잊지 않게 하고, 잊힌 존재들을 다시 불러내며, 그렇게 삶을 붙들게 합니다. 그리하여 문학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존재의 기초입니다.

청람 평론가님의 글은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 사실을 짚어주었습니다. 겉으론 강한 척하는 사람, 웃고 있지만 내면은 갈라진 논바닥처럼 금이 가 있는 사람, 그런 이들에게 문학은 무엇이 되어줄 수 있는지를, 말보다 ‘머무름’으로 보여주는 문학의 본령을 되새기게 해 주셨습니다. 평론가님 문장에서 저는 ‘문학은 사람이 되어 사람 곁에 머문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시대에 문학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문학으로 사람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매우 용기 있는 선택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선택의 선두에 청람 김왕식 평론가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든든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삶의 가장 낮은 곳까지 빛을 비추는 문학의 물길을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물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진심을 다해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2025년 어느 여름날,
연세대학교에서
김철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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