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자 한 채 올렸으니 ㅡ 시조시인 권갑하

김왕식




권갑하 시조시인









정자 한 채 올렸으니
ㅡ주암정



시인 권갑하




흘러야만 강이던가
떠나야만 사랑일까

그늘도 없이 연꽃은
햇살 속 피었다 지네

머물 줄 몰랐던 마음
이젠, 떠나도 되겠지





머물지 않는 것들의 아름다움
― 권갑하 시인의 「정자 한 채 올렸으니」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정자는 머무름의 상징이다.

권갑하 시인의 「정자 한 채 올렸으니」 속 ‘주암정(舟巖亭)’은 머무름이 아닌 떠남과 흘러감의 철학을 품고 있다. 이 짧은 시는 단순한 감정의 정조가 아니라, 삶의 무상(無常)을 통과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미의식의 집약이다. 정자 한 채를 올렸다는 고백은 곧 시인이 세운 내면의 지점이다. 그것은 은둔이 아니라 조용한 개입이며, 붙잡음이 아니라 보내는 일이다.

“흘러야만 강이던가 / 떠나야만 사랑일까”라는 의문은, 삶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역설을 드러낸다. 고정된 정의에 대한 회의이자, 흐름과 떠남에 대해 다시 묻는 사유다. 강은 흐르되, 그 자리의 강이기도 하다. 사랑은 떠나되, 가슴에 남기도 한다. 시인은 질문을 통해 하나의 해답이 아닌, 다의적 생의 층위를 보여준다. 이는 권갑하 시인이 늘 지향해 온 '말의 여백에 머무는 존재론적 미학'의 연장선에 있다.

“그늘도 없이 연꽃은 / 햇살 속 피었다 지네”는 이 시의 백미다. 그늘이 없어 보호받지 못한 연꽃은 정결하게 피고 조용히 진다. 그 모습은 다름 아닌 시인의 삶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보호받지 않아도 꿋꿋이 피어오르고, 이름 남기지 않고 스스로 저무는 자세. 권갑하의 시는 언제나 그러했다. 화려하지 않되 단단하고, 조용하지만 예리하다. 꽃이 ‘지네’라는 낱말 하나에도 자연과 생에 대한 깊은 윤리의식이 녹아 있다. 피는 것보다 지는 일이 어렵다는 걸 아는 이의 문장이다.

마지막 연
“머물 줄 몰랐던 마음 / 이젠, 떠나도 되겠지”는 삶의 일대 전환점이자, 내면의 정자 위에서 내려다본 인간의 심상이다. 머물지 못하던 마음이 이제는 스스로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진술은, 체념이 아니라 초월의 문턱이다. 떠남은 상실이 아니라 통과이며, 이는 곧 시인이 이룩한 언어의 정자, 주암정 위에 서 있는 자만이 말할 수 있는 미의 선언이다.

권갑하 시의 본질은 ‘살아본 이만이 말할 수 있는 정제된 고요’에 있다. 「정자 한 채 올렸으니」는 다 짓고 난 뒤의 언어이고, 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의 침묵이다. 머물지 않음으로써 머문 자, 붙잡지 않음으로써 남긴 자. 이 시는 작가의 철학과 미의식이 하나의 정자처럼 독자의 가슴에도 은근히 세워지는 순간이다.



ㅡ 청람 김왕식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자연인 트럭운전사 안최호 작가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