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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교수와 농촌유토피아대학교 ㅡ 사상의 숨결

김왕식






뿌리에서 피어난 유토피아
― 장원 교수와 농촌유토피아대학교, 그리고 이어지는 사상의 숨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장원 교수는 밭이 아니라 정신에 씨를 뿌린 사람이다. 도시의 아스팔트에 갇혀 숨죽인 생명의 결을 다시 흙으로 이끌어, 그 숨결을 되살리려는 영혼의 농부다. 손에는 곡괭이 대신 사상(思想)을 들고, 발은 땅을 딛고 있으나 눈은 늘 미래의 들녘을 향한다. 그는 땅을 경작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과 시대의 심층을 경작하는 자다. 그가 세운 ‘농촌유토피아대학교’는 ‘학교’라기보다는 ‘사상’이고, ‘제도’보다는 ‘운동’이며,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신념’이다.

그의 대학에는 없다. 교정(校庭)도, 등록금도, 칠판도 없다. 그러나 단단히 존재한다. 창조적 상상력, 지역 리더십, 기본소득이라는 세 개의 뿌리가 깊게 박혀 있다. 이것은 한 시대의 교육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뒤집는 선언이다. 도시가 전부인 양 교육을 포장해 왔던 근대화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장원은 “돌아가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땅을 가리킨다. 흙을, 풀을, 마을을. 그곳에서 사라진 생명과 의미를 다시 길어 올린다.

그가 바라보는 흙은 단지 토양이 아니다. 그 속에는 민초(民草)의 기억, 농부의 땀과 눈물, 잊힌 마을의 이름들이 깃들어 있다. 장원은 그 흙 위에 대학을 짓는다. 벽돌 대신 철학으로, 지붕 대신 관계로, 시멘트 대신 연대로.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먼 이상이 아니라, 흙 아래 살아 있는 생명의 언어다. 그는 잎을 보지 않는다. 뿌리를 본다. 교육이란 결국 뿌리에 물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농촌유토피아대학교의 교과과정은 마치 자연의 리듬과 닮아 있다. 1학년은 통섭, 2학년은 창조, 3학년은 리더십.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나며, 꽃 피는 생명의 순환. 학생들은 듣는 자가 아니라, 만드는 자다. 법인을 설립하고, 직접 회사를 경영하며, ‘실천’을 통해 배우는 진짜 교육의 실험실이다. 졸업 후엔 논밭으로 돌아가 3년을 봉사한다. 이 대학의 진짜 졸업식은, 흙 묻은 손으로 마을을 일으킬 때 완성된다.

그러나 그가 만드는 유토피아는 단지 지역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유실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시들어가는 영혼에 생명의 물을 붓고, 떠돌던 이들에게 뿌리를 선사하며, 인간을 다시 삶의 중심에 놓는 실천적 철학이다. 그것은 곧 ‘사상을 다시 숨 쉬게 하는 일’이며, 그 연장선에서 장원은 지금 또 다른 실천을 감행하고 있다.

그는 지금, 장준하 선생의 정신을 잇는 ‘사상계’ 복간의 중심에 서 있다. 망각된 신념, 침묵한 양심, 유폐된 정의를 다시 책의 숨결로 되살리고 있다. 농촌에서 뿌리를 말하던 그가, 이제는 시대의 정신에 뿌리를 심는다. 장준하의 이름 아래, 그는 사상을 기록하는 자가 아니라, 사상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그의 턱수염은 단지 외양이 아니다. 바람에 흔들려도 뽑히지 않는 신념의 줄기. 수염의 끝마다 깃든 사상은 사람들을 향해 조용히 속삭인다. "나는 오늘도 뿌리를 키운다." 그의 그늘 아래선 바람도 잠시 머물고, 사람도 마음의 호흡을 다시 찾는다.

장원 교수. 그의 이름은 방향이다. 도시의 빛만을 따라가는 시대에, 그는 별빛을 좇는 사람이다. 정보보다 감각을, 성과보다 생명을, 속도보다 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가 만드는 학교는 건물이 아니라 관계이고, 제도가 아니라 삶이다. 뿌리에서 피어난 유토피아. 그 위에 한 사람의 턱수염은, 바람 따라 웃고 있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만나야 할 진짜 ‘교수’이며, 참된 ‘스승’이며, 사상과 생명을 연결하는 살아 있는 다리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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