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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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천의 오후 풍광
청강 허태기
언덕 늘어진
불꽃 장미
오월을 태우고
레몬향 짙은
인동덩굴 꽃
여인의 심장 물들인다
시들어가는
찔레꽃
향기마저 애처로운데
수면 위로 튀는
피라미의 은빛 군무群舞
지는 해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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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천의 오후, 서정의 결을 거닐다
― 허태기 시인의 ‘도봉천의 오후 풍광’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태기 시인은 자연이라는 거울에 자신의 내면을 비추고, 그 거울 속 풍경에서 인생의 결을 읽어내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자연 묘사의 외피를 두르되, 그 속에는 늘 한 인간의 존재론적 사유가 심층적으로 숨 쉬고 있다.
『도봉천의 오후 풍광』은 단지 지역적 정경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찰나의 풍경 안에 스며 있는 삶의 덧없음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붙드는 섬세한 손길의 기록이다.
“언덕 늘어진 불꽃 장미 오월을 태우고”라는 시의 첫 행은 계절의 절정에서 피어오른 생명의 환희를 극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그 환희는 결코 오래 머물지 않는다. “레몬향 짙은 인동덩굴 꽃 여인의 심장 물들인다”는 구절에서 시인은 향기를 통한 감각의 언어로 사랑과 그리움, 혹은 내면의 상처를 유려하게 직조해 낸다.
여기서 ‘여인’은 특정 인물을 지시하기보다는, 삶의 한 국면이나 감정의 상징적 형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 물듦은 곧 존재의 흔들림이며, 삶이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가는 어떤 체험을 은유한다.
이어지는 “시들어가는 찔레꽃 향기마저 애처로운데”라는 행은, 절정이 지나 퇴색해 가는 생의 장면을 보여주며, 그 속에서도 향기를 지닌다는 점에서 자연과 인간 존재의 존엄을 잊지 않는다.
허태기 시인의 미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난다. 그는 사라짐의 서글픔을 직시하면서도, 그 소멸 속에 깃든 향기, 즉 존재의 의미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마지막 연, “수면 위로 튀는 피라미의 은빛 군무 지는 해가 아쉽다”는 구절은 시 전체의 정조를 응축한다. 생은 찰나이며, 찰나는 아름답기에 아쉽다. 피라미의 군무群舞는 생동의 리듬이자 시인의 심장의 박동이며, 지는 해는 누구도 붙들 수 없는 시간의 경계이다.
허나 허 시인은 그 경계를 응시함으로써 오히려 사유의 깊이를 넓힌다. 그는 시인으로서 자연과 계절, 감각과 상념, 무상과 정한 사이를 부단히 왕래하며, 독자에게 사유의 여백을 건넨다.
허태기 시인의 작품 세계는 ‘존재의 연약함’에 대한 공감과 ‘사소한 것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정제되어 있다. 그는 한 줄의 시 속에서도 삶의 무게를 감지하고, 그 무게를 꽃의 향기처럼 가볍고 따뜻하게 푸는 방식으로 우리 앞에 놓는다. 그 미학은 꾸밈이 없으며, 도봉천의 오후 햇살처럼 소박하되 정직하다.
이 시 한 편은 단순한 자연시가 아니다. 그것은 생의 끝자락에서조차 사라지지 않는 향기에 대한 시인의 신념이며, 그 신념을 시어로 증명해 낸 고요한 울림이다. 도봉천을 거닐던 어느 오후, 시인은 풍경을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무늬를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하여, 이 시는 풍경의 시가 아니라, 삶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풍경 속 ‘사람의 시’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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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