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기 시인의 「냇가에서」를 읽고 ㅡ청람 김왕식

김왕식










냇가에서





시인 청강 허태기





귀밑을 스치는 바람
하얀 물보라 흘리는 여울목
잔잔한 물결 씻어내리는 모래톱 언저리

잎새 접어
하늘거리는 갈대
뚝길 따라 나풀대는 가냘픈 풀잎이 바람을 노래하고

노란 금계국金鷄菊이
머리 조아리는 언덕
물소리 바람소리에
가만히 나를 비운다.








비움의 미학과 서정의 언어로 빚은 존재의 풍경
― 허태기 시인의 「냇가에서」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청강 허태기 시인은 자연이라는 거울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비춰내는 시인이다. 그의 시 세계는 조형적인 미감으로 꾸며진 언어의 장식이 아니라, 오래도록 삶의 강을 따라 흐른 사유와 겸허의 흔적이 만든 ‘침묵의 언어’다. 자연의 소리, 바람의 움직임, 꽃잎의 몸짓 하나하나를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 그의 시심은 단지 보이는 것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비워내는 데 있다.
시「냇가에서」는 그 미의식이 가장 정수로 스며든 한 편이다.

“귀밑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첫 행은 외부 세계가 시인의 감각을 통과하며 내면의 진동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담고 있다. 감상자가 아니라 동참자의 위치에서, 시인은 냇가의 여울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물보라에 젖는다.
이는 청강 허태기 시인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과 닮았다. ‘관찰자’가 아니라 ‘경험자’로 존재하는 것. “하얀 물보라”는 그저 풍경의 한 조각이 아니라, 시인의 생이 씻겨나가는 순수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갈대와 풀잎, 금계국은 모두 바람에 몸을 맡긴다. 이때 ‘하늘거리는’, ‘나풀대는’, ‘조아리는’ 등의 동사는 자연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흐름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조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이 곧 허 시인의 철학이다.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다가오는 인연을 받아들이며, 바람을 타는 삶. 시인은 생의 방향키를 움켜쥐기보다, 더듬이처럼 자연에 기대어 흐르는 법을 택한다. 거기엔 노장老莊적 무위無爲의 사유가 깃들어 있다.

“물소리 바람소리에 / 가만히 나를 비운다.”

이 구절은 시의 압권壓卷으로서 단순한 결말 이상의 철학적 울림을 가진다. 물소리와 바람소리는 시간의 리듬이자 자연의 숨결이다. 그 소리 앞에 '가만히' 자신을 '비운다'는 말은 언어를 넘어선 깨달음이다.
이 표현은 인간 존재가 자연과 합일되는 순간, 가장 아름답고도 고요한 경지에 이른다는 진리를 시적으로 승화시킨다.

그는 농민처럼 시를 짓는다. 땅을 갈아엎듯 단어를 다듬고, 계절을 읽듯 마음을 여며, 물처럼 자신을 낮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조용하지만 힘이 있다. 짧지만 깊이가 있다. 말이 적을수록 침묵은 더욱 많은 것을 말한다는 진실을 그는 알고 있다.

청강 허태기 시인의 시「냇가에서」는 단순한 자연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소박한 해탈이며, 인간이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의식의 순례다. 이 시 한 편만으로도 허태기라는 이름은 한국 서정시의 진실한 강가에서 오래도록 반짝일 것이다.






□ 허태기 시인

□ 허태기 시인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민심의 선택 이후, 두 사람에게 바치는 응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