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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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게 물을 주며
시인 이종식
저녁밥 뒤에야 겨우
꽃에게 말을 건넨다
하루의 울분을 털고
물처럼 마음을 따라 흘러가며
내 손끝에서 생명이 다시 숨 쉰다
처음엔 의무였다
한 줌의 물처럼 건성건성 주었지만
오늘은 다르다
꽃이 먼저 나를 바라보는 듯
고맙다고,
잘 자라고,
내일은 더 찬란하라고 속삭인다
물을 준다
줄기마다 미안하다는 마음과
조금 늦은 인사를 함께 붓는다
그냥 이 순간이 참 좋다
회사도,
자식 걱정도,
세상에 대한 실망도
다 물처럼 흘려보낸다
지금 이 발로 걸을 수 있는 것
이 손으로 물을 줄 수 있는 것
지하수처럼 깊은 감사가 터진다
TV 속 안세영의 승리
그 작은 몸짓 하나에도 감동이 흐르고
자식이 적당히 속 썩이는 것도
내 삶의 긴장을 놓지 않게 해 줘서 고맙다
오늘 밤하늘은 어찌나
시원하고 정직한지
별빛이 내 마음을 대신 꿰매주고
바람은 오래된 걱정을 털어내 준다
박경수라는 이름의 사내,
바이크로 알프스를 수십 번 넘었다는 그 이야기
79세, 미 서부에서 멈춘 엔진
그 죽음마저 감사로 남긴 가족들
나도 불현듯
그 길 위에 서고 싶어진다
두 다리로 걷고,
두 눈으로 보는
단 한 번의 인생을 위해
꽃에 물을 주며
나는 내 안의 주인공을 깨운다
오늘 하루,
참 잘 살았다고
나 자신에게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
■
삶의 고요한 축복을 물 주듯 나누다
― 이종식의 「꽃에게 물을 주며」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종식 시인의 「꽃에게 물을 주며」는 사소한 일상의 행위 하나를 통해 존재의 의미와 삶의 진정한 주인됨을 깨우는 감동적인 내면 여행이다. 시인은 텃밭의 꽃과 나누는 물 한 바가지의 시간 속에서, 그동안 자신을 얽매었던 세상의 잡음을 지우고, 지금-여기의 충만한 감각으로 생의 진실한 감사를 일구어 낸다. 이 시는 단지 꽃에게 물을 주는 장면이 아니라, 내면의 울분을 헹구고 자아의 중심을 다시 적셔주는 정화의 의례로 읽힌다.
작품의 메타포는 강력하면서도 따뜻하다. 물은 단순한 생명 유지의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곧 감정의 흐름이요, 마음의 씻김이며, 사랑의 전언이다. 시인은 물을 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미안함, 고마움, 사랑을 꽃에게 건넨다. 그 과정은 스스로의 마음을 향한 정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줄기마다 미안하다는 마음과 / 조금 늦은 인사를 함께 붓는다”는 표현은, 인간이 얼마나 자주 중요한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는지를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 명구다.
이 시의 또 다른 중요한 미학은 '현재의 발견'이다. 시인은 회사, 자식, 사회, 시대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일상에서 물을 주는 행위 하나로 벗어나, 마침내 지금 이 순간의 공기와 하늘과 마음의 편안함을 감각적으로 껴안는다. 그는 감사할 것을 찾지 않는다. 그저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와 순간 속에서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는 작위 없는 순수한 생의 감각이다. '지하수처럼 깊은 감사가 터진다'는 구절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삶에 대한 근원적 감사의 감정을 정확히 상징한다.
박경수라는 인물의 바이크 노정과, 서부에서 생을 마감한 노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삽화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한 번뿐인 인생’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철학적 자각의 장치다. ‘죽음마저 감사로 받아들이는 가족들’이라는 표현은 삶에 대한 태도가 곧 죽음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준다.
인생의 대서사 속에서 ‘꽃에게 물을 주는 행위’ 가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길일 수 있음을 시인은 조용히 전한다.
이종식 시인의 삶의 가치철학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이라는 것. 그는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순간을 얼마나 깊고 뜨겁게 받아들이는가를 통해 인간 존재의 품격을 드러낸다. 물을 주는 행위가 자신을 돌보는 일이 되고, 꽃을 돌보는 일이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일로 확장된다.
「꽃에게 물을 주며」는 독자들에게 말한다. 인생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고, 다만 우리가 자주 그것을 놓치고 있을 뿐이라고. 이 시는 그 놓친 자리를 꽃처럼 다시 피워내는 시인의 맑은 손길이다. 그리고 그 손끝에서 번지는 물기 어린 온기가 독자의 가슴마저 적셔준다. 이는 진정 '시가 삶을 닮았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감동이다. ㅡ 청람
□ 이종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