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람 김왕식
노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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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노인의 눈물, 젊은 나태의 비문
— 복지라는 이름의 불편한 진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해가 기울고 노을이 불그스름하게 시장 어귀를 물들이던 무렵이었다.
오일장의 막바지, 다들 파장 준비에 분주한 가운데
한 노인이 시야를 붙잡았다. 그는 다리가 없어 반신불수였다.
몸뚱이는 바람 빠진 타이어 튜브에 얹혀 있었고,
손에는 작고 오래된 손수레가 쥐어져 있었다.
그 손수레 안에는 목욕수건, 휴지, 비누 같은 자잘한 생필품 등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마치 지상의 인어처럼, 땅을 기어 다녔다.
진흙보다 무거운 현실을 밀며, 한 끼의 밥벌이를 위해 시장 바닥을 긁고 있었다.
반면,
며칠 전 지하도 근처, 눈매는 또렷하고 팔다리는 멀쩡한 젊은이가
“일자리가 없다”며 종이컵을 들고 앉아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스마트폰을 하다 말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눈을 맞췄다.
“형님, 천 원만요.”
돈을 주자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고마움이 아니라 권리처럼 여겼다.
두 장면이 교차했다.
기어 다니며 생존을 건 장사에 나선 인어 노인,
그리고 의자처럼 도로 위에 앉아 ‘복지의자’를 편안히 점유한 젊은이.
이 사이에서 마음은 묵직해지고, 눈은 씁쓸해졌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청년 실업수당’이라는 단어는
언뜻 들으면 정의롭다.
들리는 모양은 “청년을 도와야 한다”는 말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월 얼마를 준다”는
묘한 ‘무위의 장려금’이다.
그 의도는 이해한다.
청년층의 취업난, 격차 확대, 절망의 시스템—모두가 복지로 덮어야 할 현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방식이다.
기회 대신 안락을 주는 복지는
마치 설탕물만 마시게 해 놓고
왜 살이 찌냐고 묻는 것과 같다.
무작정 퍼주는 수당은 결국
생산을 유보한 채 소비만 자극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멍하니 앉아 종이컵을 든 청년’이라는
인간형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복지가 아니라 포퓰리즘이다.
표를 위한 포장, 세금을 담보로 한 '게으름의 면죄부'에 가깝다.
그렇게 청년은 일어서지 않고
노인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땅을 기어 다닌다.
국가가 정말 도와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노동의 의지가 있으나 신체가 없는 사람인가,
신체는 멀쩡하나 의지가 결여된 사람인가?
정작 손이 필요한 이는 손이 없고,
손을 뻗는 이는 마음이 없다.
복지는 곧 ‘기회의 복원’이어야 한다.
누워 있는 자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일어설 수 있도록 ‘버팀목’을 주는 일이다.
그러려면 선별과 조건이 필요하다.
복지는 의무 없는 권리가 아니라,
책임을 수반하는 사회계약이어야 한다.
인어 노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창을 헤엄치듯 하루를 밀어낸다.
허리보다 무거운 삶을 끌며,
단 한 끼라도 온전히 스스로 먹고자 한다.
이 나라의 복지 정책이
그의 손수레를 밀어주는 데 쓰였더라면,
진짜 복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한 명에게 천 원’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자립의 자극’이다.
복지는 나눔이기 전에 ‘바른 물음’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도와야 사람이 사람답게 설 수 있을까.
그 물음이 없는 퍼줌은,
결국 구걸을 확산시키는 또 다른 질병일 뿐이다.
시장은 파장했지만,
그날의 노인은 아직도
마음속에서 계속 손수레를 밀고 있다.
그 손수레는
청년, 복지, 정의, 그리고 대한민국의 내일을
조용히 실어 나르고 있었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