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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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초등학교 친구를 바라보며
― ‘귀천’을 곱씹는 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두 가지 세계를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영혼의 안식과 회귀에 대한 초월적 사유이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이들의 슬픔이라는 절절한 현실이다. 너의 삶을 바라보며 지금 내가 선 자리는 그 두 세계의 경계선이다. 태연한 척 말을 건네다가도 문득 목이 메고, 초연한 표정을 보이다가도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하게 된다.
언젠가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을 너와 함께 읽은 기억이 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그 시를 읽던 너는 마치 그 길을 미리 걸어본 사람처럼 조용히 미소를 지었지. 그때는 시 한 줄이 그저 문장이었는데, 지금은 그 문장이 너의 삶을 대변하는 듯 가슴 깊이 박힌다. 시인은 삶을 소풍이라 했고, 죽음을 돌아감이라 했다. 참 고요하고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육신의 고통과 이별의 눈물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너의 삶은 이제 끝자락에 와 있다. 의학적으로도, 시계적으로도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객관 속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몹시도 주관적이고, 인간적이다. 너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너 없는 시간은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아직도 너는 여느 때처럼 농담을 건네고, 조용히 음악을 듣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조용함이 이제는 무언의 이별 인사로 들려, 나를 더욱 침묵하게 한다.
죽음을 앞둔 너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워 보인다. 마치 천상병이 말한 대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 하늘로 날아갈 채비를 다 마친 사람처럼. 그러나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 남겨질 나는 너의 빈자리를 매일같이 감당해야 할 것이고, 네가 그리워 펑펑 울 날도 많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떠나지만, 막상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 시간을 앞당겨 마주하게 되면, 우리의 시간은 무겁고 천천히 흐른다.
그렇지만 너는 말한다. “삶이란 잘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잘 돌아가는 것”이라고. 네 말이 맞다. 죽음은 파멸이 아니라 회귀이며, 종말이 아니라 귀환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나 이 말 한 줄이 슬픔을 완전히 지울 순 없다. 너와 나눈 수많은 기억이 내 가슴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너의 마지막 시간이 부디 평온하길 바란다. 더는 아프지 않기를, 더는 외롭지 않기를.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언젠가 나도 너를 따라갈 수 있기를. 그때는 다시 맑은 봄날의 소풍처럼, 함께 웃으며 걷기를. 그것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도다.
하늘로 돌아가는 너를
지금 이 땅에서
가만히 배웅한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