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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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와이너리, 4000편의 숙성
청람 김왕식
브런치스토리는 내게 한 잔의 묵은 와인 같다. 처음 마셨을 땐 그 맛을 다 알 수 없었고, 어느 날 문득, 혀끝에 닿은 시간의 결이 울림을 남겼다. 내게 브런치는 단순한 글쓰기 플랫폼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문장의 탱크에 담긴 발효실이자, 삶의 찌꺼기까지 버무려 다시 향기로 피워낸 인문적 와이너리였다. 생각이 거기서 발효되었고, 감정이 숙성되었다. 1년 남짓 글을 썼다고 하기엔, 이 숫자—4000편이라는 숫자는, 마치 한 그루 올리브나무가 천 번 바람에 흔들려야 비로소 한 방울의 기름을 낸다는 비유처럼, 시간을 깎고 마음을 쪼개 얻은 기름방울이었다.
나는 내 글을 한 번도 '작품'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상에 던져놓은 문장들이 아직 덜 익었기 때문이다. 포도주가 참된 맛을 내려면 오랜 시간 어둠 속을 견뎌야 하듯, 글도 빛 아래 꺼내기 전에 충분한 침묵을 견뎌야 한다. 그래서 지금껏 올린 모든 글은 '예비된 숙성물'이었다. 작품은, 언젠가 스스로 와인을 따라 마시는 날, 그 향이 나를 울릴 때야 비로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다.
그 과정에서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이름 앞에 ‘시인’, ‘수필가’, ‘평론가’라는 수식이 붙었고, 강의 요청이 이어졌으며, 지금은 기업체에서 정기적으로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외부의 성취보다 더 소중한 건, 매일 아침 브런치 페이지를 열며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오늘, 너는 무엇을 숙성시킬 것인가?”
사람마다 글을 빚는 방식은 다르다. 어떤 이는 한 편의 글을 수십 번 다듬으며 수정의 망치로 문장을 벼리고, 또 어떤 이는 번개처럼 떠오른 시상을 쏟아붓는다. 나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다. 내 방식은, 시상이 떠오르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일단 써놓는다. 미완성의 상태로 메모장을 열고, 시간을 들여 숨결을 불어넣는다. 마치 포도송이를 수확하듯, 아직 떫은 채로 바구니에 담아두었다가 천천히 향을 재워가는 셈이다.
이런 나의 습관은 때로 오해를 불러왔다.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영감이 떠올라 조용히 메모할 때면, 내 눈을 보지 못한 이들은 경청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지금은 다르다. 나는 언제나 말한다. “선생님의 말씀이 제게 너무 깊은 울림을 줘서,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리 양해를 구한다. 문장 하나에도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글을 쓰며 배웠다.
오늘, 그 숙성된 저장고에 4000번째 문장이 쌓였다. 그것은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묵은 향이다. 실패도 있었고, 날것 그대로의 부끄러운 언어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글에는 당시에 나였던 어떤 진심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내가 만든 이 작은 와이너리에는 기쁨도, 슬픔도, 사유도, 사랑도, 사람도 함께 담겨 있다. 그리고 이제야 말할 수 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없지만, 이 노정은 분명 작품에 이르는 길이었다고.
앞으로도 나는 계속 숙성시킬 것이다. 마음속 와인을, 다시 한번 붉게 피어오르게 할 이야기를. 그렇게 글을 빚는 이 시간이, 내 삶의 가장 진한 향이 되기를 바라며.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