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종각 열찻집
■
기다림의 미학
― 종각 열찻집에서 장호권 선생을 기다리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종각 한복판,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져가는 골목 어귀. 그 좁다란 길목을 따라 들어서면, 낮은 지붕에 은은한 불빛이 비추는 선술집 하나가 숨을 쉬고 있다.
이름하여 ‘열찻집.’ 뜨겁지도 않고 식지도 않은, 사람 냄새나는 이 공간은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장소다. 그 속에 앉아 나는 오늘, 위대한 독립운동가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 선생을 기다리고 있다.
탁주 한 병이 나무 상 위에 놓였다. 아직 잔은 비어 있고, 술은 움직이지 않지만, 마음속 잔은 이미 기울어 가고 있다. 기다림은 마치 술이 그렇듯, 시간이 숙성시켜 주는 감정이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기다리는 것. 그 대상이 사람일 때, 그 기다림은 곧 예(禮)이고 시(詩)이며 철학이다.
벽 사면을 둘러보니 낙서가 가득하다. 연인의 이름, 인생의 한 구절, 고단한 하루의 기록들, 혹은 술김에 남긴 흐릿한 자취들. 그 모든 흔적은 벽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이 공간을 ‘기억의 장소’로 만든 힘이다.
세월의 흔적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무수한 삶의 궤적들이 포개지고, 이내 또 하나의 시간이 덧입혀진다. 오늘 이 자리, 내가 남기는 기다림의 마음도 언젠가 누군가에겐 하나의 숨결로 기억될까.
기다림이 주는 묘미는 ‘언제’가 아니라 ‘어떻게’에 있다. 정해진 약속 시간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다리는 자의 마음가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새기고’ 있다. 사람을 위한 시간, 그보다 아름다운 시간이 어디 있으랴.
황진이의 시조가 문득 떠오른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임을 향한 간절함이 절절히 배어 있는 시. 기다리는 시간이 길수록 마음은 깊어진다. 그녀는 ‘지나는 바람조차 님인가 하여’ 시선을 돌렸다 했고, 나는 지금, 이 열찻집의 나무문이 삐걱 열릴 때마다 그 문 안으로 들어올 사람을 마음속으로 수십 번 그려본다. 그는 어떤 얼굴로, 어떤 목소리로 오늘을 맞을까. 장준하 선생의 아들로서, 시대를 짊어진 사람으로서, 그리고 오늘 이 만남의 벗으로서.
기다림은 가슴을 연다. 준비 없이 만나는 자리는 우연에 불과하고, 가슴을 열고 기다리는 자리는 인연이 된다. 열찻집이라는 이 공간도, 기다림을 통해 비로소 살아 있는 장소가 된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나무탁자 사이로 피어오르는 삶의 냄새, 주전자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온기, 먼지 낀 술병 뒤로 겹겹이 쌓인 이야기들. 그것이 기다림이 만든 풍경이다.
장준하 선생은 생전에 이곳을 자주 찾았다 한다. 투쟁의 날들 사이, 한 잔의 막걸리로 숨을 고르고, 후배들과 나라의 앞날을 토론하던 그 시간들. 그리운 풍경이었을까, 그에게도 기다림은 늘 ‘다음’을 향한 의지였을 것이다. 이토록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 쉬어간 자리에 나도 지금, 작은 마음 하나 얹는다.
기다림은 흔히 '지루한 시간'이라 불리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가장 충만한 시간이다. 내가 누구를, 무엇을, 왜 기다리는지를 자문하게 만드는 시간.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쩌면 사랑도, 우정도, 희망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의 기다림이 끝나고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이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기다렸기에 대화는 깊어지고, 마음은 더 닿게 된다. 기다림 없는 만남은 물살에 떠내려가는 말잔치일뿐이다.
탁주 한 잔을 채운다. 그리고 다시 기다린다. 기다림은 오늘도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누군가를 위해 머무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장호권 전 광복회장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