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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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하는 자화상
시인 유숙희
무지갯빛 세상
호기심에 가득 찬
맑은 눈과 우윳빛 피부
나의 유년 시절은
분홍빛 전설이 되고,
세상 희로애락에
검불 같은 흰 머리카락,
검고 윤기 있는 실
바늘귀에 꿰어
한 뜸 한 뜸 깁어나간다.
주름 파이고 골이 진
세월의 흔적 앞에서
꿰매는 손길 바빠지고
낡은 마음 밭 깁고 이어서
맑은 영혼으로
바느질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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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희 시인의 「바느질하는 자화상」을 읽고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유숙희 시인은 한국 유일의 바느질 시인이다.
시인의 시 「바느질하는 자화상」은 삶의 여러 굴곡과 변화를 정교한 바느질 행위에 은유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시인은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순수한 유년의 기억에서 출발하여, 세월이 흘러 겪게 되는 희로애락의 복잡한 감정을 검불 같은 흰 머리카락과 윤기 있는 실에 투영한다. 이처럼 시는 한 인간이 겪는 시간의 흐름과 내면의 성장, 그리고 치유의 과정을 섬세하고 품격 있게 표현한다.
첫 연에서 시인은 ‘무지갯빛 세상’, ‘호기심에 가득 찬 맑은 눈’, ‘우윳빛 피부’라는 밝고 순수한 이미지로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분홍빛 전설’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기억 이상의 신화적 의미를 담아, 그 시절이 시인의 삶에 마치 전설처럼 소중하고 찬란한 빛으로 남아 있음을 상징한다. 이는 시인의 내면에 자리한 순수성과 삶의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반영한다.
그러나 시는 곧 ‘세상 희로애락’이라는 인간 경험의 본질적 조건으로 눈길을 돌린다. ‘검불 같은 흰 머리카락’이라는 표현은 고통과 세월의 흔적을 거칠고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시인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세월의 무게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머리카락이 흰색으로 변하는 것은 노년의 상징일 뿐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겪어낸 인간의 깊이와 성숙을 의미한다. 이에 맞서는 ‘검고 윤기 있는 실’은 삶을 이어주는 긍정적인 힘이며, 바늘귀에 꿰어 한 땀 한 땀 이어가는 행위는 단순한 수공예를 넘어 내면의 치유와 재생을 상징한다.
특히 ‘한 뜸 한 뜸 깁어나간다’라는 동사는 단순히 흠을 메우는 작업이 아니라, 시간을 견뎌내며 자기 자신을 다독이고 회복시키는 치열한 정신적 행위를 함축한다. 시인은 이 과정을 통해 상처받은 ‘낡은 마음밭’을 ‘맑은 영혼’으로 되살려낸다.
이는 단순한 노화의 과정이 아니라, 삶의 깊은 성찰과 내적 성장을 거쳐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낡은 마음밭’이라는 메타포는 생명력 있는 땅에 다름 아니며, 그곳을 바느질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을 돌보고 가꾸는 적극적인 자기 치유의 모습이다.
마지막 연은 ‘주름파이고 골이 진 세월의 흔적’ 앞에서 ‘꿰매는 손길 바빠지고’ ‘낡은 마음밭 깁고 이어서’ ‘맑은 영혼으로 바느질해 간다’고 노래한다. 여기에서 바느질은 시인의 삶 자체이며, ‘맑은 영혼’으로 이어가는 끊임없는 노력과 희망을 담은 행위로 승화된다.
이 과정은 고통과 상처를 인정하고 품으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생명과 의미를 창조하는 인간의 불굴의 정신을 상징한다. 시인은 삶의 복잡다단함을 ‘바늘과 실’이라는 일상적 소재로 환원시키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경험으로 아름답게 형상화했다.
유숙희 시인의 가치철학은 이 시 속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삶의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젊음과 노년을 모두 품으며, 그 모든 순간이 하나의 자화상으로 이어진다는 인식이다. 시인은 자신과 세계를 마주하며 삶의 단면들을 끌어안고,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의미와 생명을 발견한다. 이는 자기 내면과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긍정에서 비롯된 통찰이며, 성숙한 인간의 고귀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작품 미의식 측면에서 보자면, 시는 단순하지만 함축적인 언어로 삶의 시간을 유려하게 짜 맞추는 ‘바느질’ 행위를 시각화하며, 미묘한 정서 변화를 촘촘한 이미지와 은유로 풀어낸다. ‘무지갯빛’, ‘분홍빛’, ‘검불 같은 흰 머리카락’, ‘검고 윤기 있는 실’, ‘주름파이고 골이 진’ 등의 다채로운 색채와 질감의 대비는 시각적·촉각적 감각을 동원해 독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처럼 시인은 감각과 사유가 조화를 이루는 섬세한 미적 균형을 통해, 삶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탐색한다.
또한 시의 전체 구조는 유년의 밝음에서 노년의 깊이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전개되며, 바느질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중심축으로 삼아 통일성과 완결성을 이룬다. 각 연은 삶의 단계와 감정 변화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반복되는 ‘바느질’이라는 행위를 통해 시적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는 삶의 순환성과 회복 가능성에 대한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처럼 「바느질하는 자화상」은 유숙희 시인의 인생관과 예술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삶을 한 땀 한 땀 이어가는 끈기와 인내,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영혼의 맑음과 치유를 아름답게 노래한다.
이 시는 우리 모두가 겪는 시간의 흐름과 내면의 변화,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자아와 희망을 묵직하게 담아내어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유숙희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삶의 본질을 진솔하고 고상하게 그려내며, 인간 존재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시인의 따스한 시선과 섬세한 표현력은 독자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상처를 치유하며,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게 하는 힘을 가진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자기 자신과 진정으로 마주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깊이 있는 문학적 성취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유숙희 시인의 문학 세계를 대표하는 정수로서, 한국 현대시의 섬세한 감성과 철학적 깊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고품격 시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삶을 바느질하듯 이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의 빛을 비추는 귀한 문학적 선물이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