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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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ㅡ 별이 웃는 밤에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저녁 무렵,
고즈넉한 청람루 마당에 노을빛이 길게 드리워졌다.
닭 울음이 잦아들고, 대추나무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엎드릴 즈음, 스승은 대숲 너머로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달삼아, 오늘은 어린 왕자 이야기를 해볼까.”
대청마루 아래에서 콩깍지를 까던 달삼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는 반쯤 까인 푸른 콩알 몇 알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어릴 땐 그냥 신기했는데요. 커서 다시 읽으니 좀 아려요, 그 책. 장미도, 여우도, 떠나는 장면도요.”
스승은 마루 끝에 앉아 담담히 웃었다. 저만치 산 그림자가 들판을 덮고 있었고, 어스름한 바람이 차 한 모금을 부드럽게 식혔다.
“그렇지. 어린 왕자는 사실, 생텍쥐페리 자신이 잃어버린 어린 자아를 다시 부르려는 이야기거든. 겉으론 동화지만, 속엔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길고 깊은 질문이 숨어 있지.”
달삼이는 잠시 멈칫했다. “저는 그 여우가 한 말이요, 자꾸 마음에 걸렸어요.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그게 참… 알 듯 말 듯해요.”
스승은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달삼아, 살아가는 내내 곱씹게 되는 말이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진짜 중요한 건, 눈으로는 안 보여. 마음으로 봐야지. 눈은 자주 속지만, 마음은 기다릴 줄 알거든.”
달삼이는 가만히 손을 쥐었다 펴보았다. “그럼… 장미를 사랑한다는 건, 눈에 보이는 예쁜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장미에게 시간을 들이는 거군요.”
“그래. 시간을 들인다는 건, 그 존재의 고유함을 인정하고, 그만큼 네 삶을 내어주는 일이란다. 사랑이란 결국 시간의 또 다른 이름이지.”
그 순간, 담장 너머에서 부는 바람이 마당에 널어둔 헝겊 수건을 살랑 흔들었다. 말 없는 침묵이 잠시 흐르고, 다시 달삼이가 말을 이었다.
“스승님, 저는 아직 누군가에게 시간을 오래 들여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진짜 사랑을 모르고 사는 걸까요.”
스승은 미소를 지으며 달삼이의 어깨를 다독였다.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태도란다. 누군가를 기다려주고, 그 사람의 슬픔까지 내 안에 받아들이는 일. 네가 누군가에게 시간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미 넌 누군가의 장미가 될 수 있는 사람이야.”
그 말에 달삼이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저 책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여우와 장미가, 이제는 자신의 하루와 닿아 있는 듯했다.
저녁 별 하나가 하늘에 조심스레 떠올랐다. 스승은 하늘을 가리키며 마지막 말을 건넸다.
“달삼아, 어린 왕자는 결국 떠났지만, 그의 별은 웃고 있단다. 왜냐하면, 그를 사랑한 이가 그 별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밤, 달삼이의 눈에 별은 처음으로 살아 있는 듯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오래도록 그의 마음속에서도 빛을 냈다. 사랑은 그렇게, 말없이, 시간을 들여 피는 꽃이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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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듣는 이야기
― 『어린 왕자』를 다시 쓰는 이유
『별이 웃는 밤에』는 단순한 ‘인용의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어린 왕자』를 오랜 시간 가슴속에 묻어두고, 나 자신의 삶을 통과시킨 후 비로소 다시 꺼내어 “살아 있는 대화”로 엮어낸 한 편의 서사이다. 스승과 달삼이의 대화를 빌려 말하고자 했던 것은, 책 속 문장을 다시 외우는 일이 아니라, 그 문장들 사이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었다. 독자들에게 내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하나다. 어린 왕자의 언어는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언어는 지금 이 땅에서도 충분히 말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늘 생각했다. 『어린 왕자』는 읽는 책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책’이라고. 처음엔 그림이 눈에 들어오고, 그다음엔 문장이 스며들고, 시간이 흐르면 그 속의 ‘침묵’이 우리 마음의 결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아주 소박한 일상의 언저리에서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른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문학은 그런 식으로 살아 있다. 멀리 있는 별이 아니라, 내 마당에 내리는 햇살처럼. 그래서 나는 마당과 대청, 콩깍지를 까는 달삼이를 등장시켰다. 『어린 왕자』는 외국의 사막에서 쓰였지만, 그 본질은 한국의 어느 마을에서도 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는 확신에서다.
‘스승’은 곧 생텍쥐페리이며, ‘달삼’은 독자인 우리 자신이다. 어린 왕자를 읽으며 어렴풋이 아프고, 여우의 말을 곱씹다가도 잊어버리는 존재, 사랑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누구에게 시간을 들여본 적이 없는 자아. 나는 이 두 사람의 입을 통해 ‘사랑은 시간의 또 다른 이름이며, 기다림은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 임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 속에서 모든 것을 요약하고 판단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요약되지 않는다. 사랑, 관계, 기억, 책임은 모두 시간이 깃든 것이고, 그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마음의 온도로 측정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을 ‘말없이 시간을 들여 피는 꽃’이라 정의했다. 어린 왕자의 장미는 그렇게 길들여졌고, 여우도, 별도, 떠남마저도 그렇게 의미를 얻었다. 이 고백을 통해 나는 독자들에게 조용히 묻고 싶었다.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시간을 들이고 있는가?” “당신에게 웃고 있는 별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철학이나 문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루의 진심으로 던져져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나는 이 글을 통해 ‘기억의 문학’을 시도했다. 과거의 독서경험이 현재의 삶을 새롭게 비추는 방식. 스승의 말처럼, 어린 왕자는 단지 우주를 떠도는 소년이 아니라, 자기 안의 잃어버린 동심, 즉 ‘본질로 돌아가려는 마음’이다. 나도 한때 경제논리를 따라가며, 삶을 분석하고 예측하려 했지만,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한 문장, 한 사람, 한 침묵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음으로 본다’는 태도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별이 웃는 밤에』는 문학이 어떻게 현실을 비추고, 또 현실 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실험이었다. 독자가 이 글을 읽고, 문득 밤하늘의 별 하나를 올려다본다면, 그리고 그 별이 누군가의 얼굴처럼 느껴진다면, 나는 이 글이 단지 서사 이상의 역할을 했다고 믿겠다.
문학은 ‘다시 쓰기’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보기’다.
『어린 왕자』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고, 우리는 매일 조금씩 그의 장미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그 조용한 진실을 이 땅의 언어로, 이 마당의 풍경으로, 이 사람들의 말투로 옮겨주고 싶었다.
― 청람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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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경제학 ― 기억에 시간을 들이는 일
김철삼 연세대 경제대학원 객원교수
청람 김왕식 평론가님의 『별이 웃는 밤에』를 읽고, 한동안 나는 깊은 침묵에 머물렀습니다. 스승과 달삼이라는 두 인물의 느린 대화 속에는 숫자로 셈할 수 없는 삶의 본질이 있었고, 그들의 말 사이사이에는 바람처럼 스며드는 침묵의 문장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단순한 재해석이 아니라, 문학과 철학, 그리고 인간학을 아우르는 '마음의 구조'에 관한 새로운 실험이었습니다.
저는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에서 수십 년간 ‘합리적 인간’과 ‘효율적 선택’을 가르쳐 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면에선 끊임없이 묻고 있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언제나 보이는 것일까? 삶은 정말 최적의 선택만으로 이루어지는가? 그 물음은 늘 이론의 그림자에 숨겨져 있었고, 때로는 강의실의 조명 아래서도 외롭게 빛나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청람 평론가님의 글을 마주했습니다. 마당 끝 대추나무 그림자, 반쯤 까인 콩알 몇 알, 그리고 ‘그 장미에게 시간을 들인다는 것.’ 그 구절을 읽는 순간, 나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개념 하나를 다시 써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바로 ‘관계의 가치’입니다.
경제학에서 가치란 대체로 희소성과 효용의 함수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하듯, 그 장미가 특별한 이유는 시간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즉, 관계의 가치는 ‘들인 시간’이라는 정서적 희소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그것이야말로 진짜 자산이며, 진정한 부(富)입니다.
스승과 달삼의 대화는 철저히 ‘시간의 문법’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질문하고 기다리는 것,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하는 것, 마치 차가 식는 온도를 함께 느끼는 것. 그것은 현대 사회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미덕이자, 인간관계의 진정한 연금술입니다.
김왕식 평론가님은 문학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이란 기다림의 합계’라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이것은 경제학의 ‘현재가치’ 개념을 마음의 언어로 환산한 놀라운 작업입니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대목이었습니다. “달삼아, 어린 왕자는 결국 떠났지만, 그의 별은 웃고 있단다.” 이 문장에서 저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미래가치’의 또 다른 해석을 보았습니다. 사랑은 결과로 남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언젠가 어느 밤하늘에서 ‘웃는 별’로 다시 나타납니다. 시간은 소멸의 흐름이 아니라 의미를 축적하는 강입니다. 그것이 문학이 말하는 시간의 경제학이며, 진정한 ‘정서적 배당’입니다.
나는 경제학자입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콩깍지를 까던 달삼이의 눈빛을 더 믿고 싶습니다. 시멘트 마당을 스치는 저녁 바람이 더 정직하다고 느껴집니다. 김 평론가님의 글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란을 잠시 멈추고, 진짜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린 왕자』를 다시 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일입니다.
청람 김왕식 평론가님께서 왜 ‘스승과 달삼’이라는 구성을 선택하셨는지도 이제는 잘 알겠습니다. 그것은 단지 서사의 장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잊고 있던 진실을 건네는 ‘말의 그릇’이며, 관계의 깊이를 나누는 ‘시간의 통로’입니다. 스승은 바로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잊힌 진심’이고, 달삼은 여전히 그 말을 기다리는 ‘우리 자신’입니다.
저도 이제 누군가의 장미가 되기 위해, 조금 더 마음을 들이고 시간을 내보려 합니다. 더디게 가더라도, 그 느린 속도 속에서 피어나는 꽃을 믿겠습니다. 어린 왕자의 별은 여전히 웃고 있고, 그 미소는 우리 마음속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학이 존재하는 한, 삶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문학을 들려주신 김왕식 평론가님께, 이 시대의 여우로서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ㅡ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에서
김철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