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황성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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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알알이 익어가는데
시인 황성구
내 고향 뒷마당 담장 너머
주저리주저리 청포도 송이
알알이 영글어 간다
바람 따라 묵은 여름 햇살 따라
초록 이파리에도 서걱대는
그리움 하나 업혀 있고
할아버지 뒷짐 지고 돌아보던 오후
아버지 웃음소리 담 너머로
넘나들던 어린 날의 나
맑은 이슬 방울져 머금은 송이마다
내 떠나온 시간들이
둥글게 맺히고 또 맺힌다.
어디쯤 다시 돌아갈까
바람 끝에 흩어진 내 목소리 하나
청포도 잎새마다 스며든다
그리운 고향은 언제나 담장 너머
청포도 알알이 익어가는 곳
내 마음도 함께 영글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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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너머 익어가는 기억의 풍경
— 황성구 시인의 '청포도 알알이 익어가는데'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황성구 시인은
가슴에 고향을 품고 있다.
그의 '청포도 알알이 익어가는데'는 단순한 향수의 시가 아니다. 그것은 고향이라는 존재론적 뿌리를 향한 내면의 회귀이며, 한 인간이 살아낸 시간의 무늬를 자연이라는 시적 이미지 안에 정갈하게 녹여낸 정념의 산물이다. 이 시는 독자의 마음에 아련한 고향의 풍경을 불러오되, 그 감성은 피상적 추억에 머물지 않고 삶과 존재, 기억과 본질이라는 깊은 사유로 확장된다.
시의 공간은 ‘고향 뒷마당 담장 너머’로 시작된다. 담장은 단절이자 경계이며, 동시에 시인이 기억으로 넘나드는 통로다. 그 너머에 주렁주렁 달린 ‘청포도 송이’는 단지 자연의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세월을 머금은 시간의 열매이며, 인생의 한 조각조각을 상징하는 생명이다. “알알이 영글어 간다”는 표현은 곧 시인의 삶 또한 천천히 영글어간다는 은유로 읽힌다.
이어지는 묘사는 섬세하다. “바람 따라 묵은 여름 햇살 따라 / 초록 이파리에도 서걱대는 / 그리움 하나 업혀 있고”—이 구절은 단순한 감상이 아닌, 자연에 감정의 결을 투영하는 시인의 정제된 시심을 보여준다. 그리움은 이파리의 서걱임 속에 녹아 있으며, 햇살과 바람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촉매다. 자연과 정서가 교묘히 융합되는 이 지점에서 시는 감각을 넘어 사유의 시로 도약한다.
시의 중반부는 회상의 전개다. “할아버지 뒷짐 지고 돌아보던 오후 / 아버지 웃음소리 담 너머로 / 넘나들던 어린 날의 나”—이 장면은 단순한 가족의 추억을 넘어서 시간의 다층적 레이어를 형성한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린 시인의 자아가 한 장면에 동시에 존재하며, 이는 시인의 현재 시점과 과거의 기억이 겹쳐지는 정서적 병치를 이룬다. 이렇듯 황성구 시인은 인물과 시간을 병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직조해냄으로써 시의 밀도를 높인다.
후반부로 접어들며 시의 정조는 더욱 깊어진다. “맑은 이슬 방울져 머금은 송이마다 / 내 떠나온 시간들이 / 둥글게 맺히고 또 맺힌다”—이 구절은 시 전체의 핵심이다. ‘이슬’, ‘송이’, ‘맺힘’이라는 시어들이 조화롭게 엮이며, 시간과 감정, 생명과 기억이 하나로 수렴된다.
이는 황성구 시인이 지닌 생명 중심의 시적 미의식을 엿보게 한다. 자연의 순환은 곧 삶의 순환이며, 포도알 하나에도 인간의 서사가 고여 있다는 깊은 인식이 깃들어 있다.
“어디쯤 다시 돌아갈까 / 바람 끝에 흩어진 내 목소리 하나 / 청포도 잎새마다 스며든다”—이 대목에서는 시인의 존재론적 질문이 조용히 배어난다. 돌아감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닌, ‘잊힌 자아’의 회복을 향한 고요한 갈망이다. 잎새마다 스며드는 목소리는 곧 시인의 영혼이자 존재의 흔적이며,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고향과 삶을 잇는 소중한 매개체임을 암시한다.
마지막 연, “그리운 고향은 언제나 담장 너머 / 청포도 알알이 익어가는 곳 / 내 마음도 함께 영글어 간다”는 시의 정수를 압축한다. 청포도의 알은 단지 포도의 성숙이 아닌, 시인의 감정, 기억, 삶의 성숙 그 자체다.
결국 이 시는 ‘익어간다’는 동사를 통해 생명의 시간성과 내면의 변화 과정을 동시적으로 드러낸다.
황성구 시인의 문학적 특징은 정감 어린 자연 이미지 속에 인간의 존재적 성찰을 감추는 데 있다. 그의 시는 일견 단순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유년의 기억과 시대적 상흔, 가족의 온기, 존재의 질문이 겹겹이 녹아 있다. 그는 자연을 노래함으로써 인간을 이야기하며, 고향을 그리워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본질을 더듬는다. 그에게 청포도는 고향 그 자체이자,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풍경이며, 동시에 지금도 가슴속에 자라나는 살아 있는 생명이다.
이 시는 결국, 담장 너머에 있는 것들을 향한 시인의 간절한 응시이며,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지금도 ‘익어가고’ 있다는 위로의 노래다
. 황성구 시인의 시에서 독자는 '되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되살아나는 마음'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조용히 읽히고도 오래 가슴에 남는다. 알알이 익어가는 청포도처럼.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