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주광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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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여름엽서
시인 주광일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 나라에 대한
한가닥 기대마저
접었더니
아 신기하구나
썩어가던 내 속
멀쩡해지는 것
같구나
하나 나라 없는 처지나
다름없게 되어버린
내가 어찌 즐겁게
살아갈 수 있으리오
못 하는 술
한 모금 마시고
취한 척
비틀비틀대보리
□
주광일 시인
1943년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와 1965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제5회 사법시험 합격하였다. 197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06년에는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로스쿨을 수료하였다.
검사로 있으면서 면도날이라고 불릴 만큼 일처리가 매섭고 깔끔하며 잔일까지도 직접 챙겨 부하검사들이 부담스러워했다. 10.26 사건 직후 합동수사본부에 파견돼 김재규 수사를 맡았으나 "개혁의지가 없다"는 이유로 원대복귀되기도 했다. 인천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있을 때 자신이 직접 언론 브리핑을 했던 인천 북구청 세금 횡령 사건, 인천지방법원 집달관 비리 사건 등 대형 사건을 처리했다.
서울지방검찰청 북부지청 차장검사로 있던 1989년 9월 18일부터 나흘간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지역법률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경제 발전 과정에 있어서의 외자도입법의 역할'이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대전고등검찰청 차장검사로 있던 1992년 8월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다닐 때 써두었던 사랑을 주제로 한 시 60편을 묶은 《저녁노을 속의 종소리》(도서출판 빛남) 등 다수의 시집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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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라는 이름의 거울 앞에서
— 주광일 시인의 '2025 여름엽서'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주광일 시인은 팔십의 연륜을 지닌 법조인이자 시인이다. 오랜 세월 정의와 질서를 수호해 온 그의 내면에는, ‘나라’라는 이름 앞에서 결코 침묵할 수 없는 염결廉潔한 정신이 뿌리내려 있다. 그런 그가 이번 시 '2025 여름엽서'에서 토해낸 언어는 단지 한 노인의 푸념이 아니라, 병든 시대를 응시하는 가장 순결한 지성의 눈물이다.
시의 첫 연에서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 나라”라는 고백은 단순한 현상 비판을 넘어서, 정의가 땅에 떨어진 현실을 향한 깊은 절망이다.
“한가닥 기대마저 접었더니 / 아 신기하구나”라는 구절은 아이러니 속의 자가치유를 드러낸다.
고통의 근원이었던 희망을 내려놓자 외려 ‘멀쩡해지는’ 자아의 감각은, 시대를 바라보는 노시인의 쓸쓸한 초월이자, 절망의 극점에서 피어나는 정신적 생존 본능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너머에서 다시 울부짖는다. “나라 없는 처지나 다름없게 되어버린 / 내가 어찌 즐겁게 살아갈 수 있으리오.”
이 구절은 헌법보다 앞선 인간 본연의 충심, 나라 없는 백성의 무력감을 일갈하는 애끓는 외침이다. 무관심과 무기력으로 뒤덮인 오늘날, 이 구절은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메타포로 빛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못 하는 술 한 모금 마시고 / 취한 척 비틀비틀대보리”라 노래한다. 절망이 몸으로 내려앉고, 언어가 더는 들리지 않을 때, 그는 취한 척 ‘연기’하며 시대의 고통을 자기 육체로 받아낸다. 이 장면은 백척간두의 현실 속에서 정신의 균형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노시인의 ‘존엄한 위선’이며, 인간의 마지막 품격을 보여주는 눈물 젖은 독백이다.
주광일 시인의 시는 어떤 수사도 필요 없는 진정성의 덩어리다. 그는 허공에 비수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칼날을 받아 안으며 시의 언어를 통해 시대의 울분을 씻는다.
시는 이념이 아니고 사람이어야 하며, 애국은 외침이 아니라 가슴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 시는 여실히 보여준다.
'2025 여름엽서'는 한 노시인의 고독한 절규이자, 동시에 이 나라의 미래를 향한 마지막 엽서이다. 그 엽서를 읽는 우리가 있다면, 우리는 아직 희망을 부를 자격이 있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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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비틀, 당신의 이름으로
— 주광일 시인께 바치는 시
김왕식
한 자락 여름바람도
나라 걱정에 마를 줄을 모른다 하시고,
골목마다 쓰러진 정의의 그림자를
한 줌 시어로 세우시던 당신,
그날 광화문 네거리엔
법보다 먼저 피어난 눈빛 하나,
비 오는 날처럼 묵묵히
국가를 품은 한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다지요.
술을 못 마시면서도
취한 척 비틀비틀,
그 걸음 하나하나에 묻어나는
이 나라의 부끄러움과 눈물,
그것이 어찌 시가 아니며
어찌 애국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시는 검보다 날카롭고
기도보다 깊었습니다.
그 어떤 교과서에도 실리지 못한
한 인간의 위대한 증언이었습니다.
선생님,
썩어가던 속이 멀쩡해졌다는 그 말씀이
가슴 저미게 아름다웠습니다.
그것은 미련을 지운 자만이 할 수 있는
참된 희망의 방식이었습니다.
이 시국의 깃발 아래
당신 한 줄기 외침이
다시 이 땅의 젊은 가슴에 바람이 되기를.
이 여름, 당신의 엽서는
나라의 심장에 꽂힌
가장 정직한 붓끝입니다.
ㅡ 청람 김왕식
□ 문학 기행에서 주광일 시인과 김왕식 평론가
□ 김왕식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