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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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시인 노태숙
봄빛 가득한 날
화실옆 작은 베란다 화분
고추, 가지, 파프리카 모종
정성스레 심었어.
농장하나 장만한 듯 뿌듯하여
어깨 들썩이며 헤실거렸지
아침마다 인사하고 써레질하니
어여삐 자라는 모습 환희로워라.
보랏빛 가지꽃, 하얀빛 고추꽃, 파프리카 고운 모습
조롱박 물 뿌리면 방끗 세수하며 웃어 주었지
생명사랑, 파란 마음
풀잎조차 밟지 못해
요리조리 옮겨가며 사랑 뿌린 한 달
어느새 치마폭에 안겨준 주먹만 한 파프리카, 튼실한 땡고추.
초록 모습 붉은 꽃 피워
초가을 내 치마폭 가득 늘어지겠지?
얘들아, 더디 크렴아
서둘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내 눈빛 속에 뛰놀다가
온은한 가을볕 속
나와 함께 빠알갛게 익어가지 않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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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정원에서 피워낸 느림의 미학
― 노태숙 시인의 '나와 함께'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노태숙 시인의 '나와 함께'는 작고 소박한 베란다 화분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한 화분 가꾸기의 소회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과 교감하며 자라나는 존재와 ‘함께’ 호흡하고, 계절의 손길을 ‘함께’ 느끼며, 끝내는 그 모든 시간과 존재를 자신 안에 품어내려는 시인의 따뜻한 인생론이자 느림의 철학이다.
“농장 하나 장만한 듯 뿌듯하여 / 어깨 들썩이며 헤실거렸지”에서 우리는 시인의 특유한 감수성을 만난다. 작은 화분조차도 거대한 기쁨으로 확장시켜 받아들이는 넉넉한 내면, 그것이 바로 노태숙 시인의 삶의 미학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닌 마음의 진정성이다. 그러므로 베란다 화분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시인이 사랑과 환희를 심고 돌보는 내면의 정원이다.
“보랏빛 가지꽃, 하얀빛 고추꽃, 파프리카 고운 모습”은 생명들의 작은 노래다. 시인은 이들을 인격적 존재로 대하며, “조롱박 물 뿌리면 방끗 세수하며 웃어 주었지”라는 시구에선, 마치 어린 자식의 세수 후 웃음처럼, 식물과 인간 사이의 교감이 살아 숨 쉰다. 이는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세계가 얼마나 인간적이며 생태적인지를 말해준다. 그녀의 시 속에선 식물도, 계절도, 햇살도 모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등장한다.
“생명사랑, 파란 마음 / 풀잎조차 밟지 못해”라는 대목은 시인의 윤리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자연 앞에서 겸손하고, 존재의 고유성을 존중하며, 작은 풀잎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자세는 그녀의 시세계가 얼마나 맑고 단단한 내면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것은 곧, 자연과 생명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깊은 교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준다.
특히 시 말미의 “얘들아, 더디 크렴아 서둘지 말고...”라는 구절은 시인의 삶의 가치철학을 가장 잘 드러낸다. 성장보다는 기다림을, 속도보다는 흐름을, 완성보다는 함께 익어감을 중요시하는 이 따뜻한 외침은 곧 시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혹은 제자들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말 같기도 하다. 급하지 않게, 조급하지 않게, 시간의 결을 따라 천천히 익어가길 바라는 마음. 그것은 요즘 시대의 숨 가쁜 리듬과는 대조되는, 진정한 ‘생명의 리듬’이다.
마지막 행 “온은한 가을볕 속 / 나와 함께 빠알갛게 익어가지 않으련?”은 시 전체의 정서적 정점이자, 시인이 삶과 생명을 껴안는 방식의 종결이다. 이 문장에서 시인은 더는 화분을 가꾸는 주체가 아니다. 외려 화분 속 식물들과 함께 가을로 익어가는 존재다. ‘나와 함께’라는 말은 시 전반의 서정적 분위기를 포근하게 감싸며, 시인 자신마저 자연의 일부로 스며들게 만든다.
노태숙 시인의 시세계는 이처럼 조용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생명을 향한 깊은 사랑, 자연을 대하는 절제된 감동, 느림을 존중하는 사유의 깊이가 숨어 있다. 그녀는 자연을 관찰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과 함께 숨 쉬고, 계절과 함께 웃으며, 식물들과 함께 자라난다. 그것이 바로 노태숙 시인이 품은 시의 본질이며, 그녀의 삶이기도 하다.
'나와 함께'는 단지 식물을 가꾸는 이야기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생명과의 동행, 존재와의 교감, 그리고 ‘함께 익어가는 시간’에 대한 잔잔한 철학으로 귀결된다.
이 시는 독자에게도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와, 무엇과, 얼마나 함께 익어가고 있느냐고. 이토록 정갈하고 사려 깊은 물음이, 노태숙 시인의 시가 지닌 문학적 미덕이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