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허만길 시인과 그의 스승 최현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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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시인/문학박사 허만길
침묵은
소리 내어 웃지도 울지도 않지만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말없이 무한한 하늘 공간에는
별의 빛도 침묵에서 나오고
어둠의 신비도 거기서 나온다.
사막은 말이 없지만
낙타를 사랑하게 하고
남극은 말없는 얼음 대륙이지만
미끄러운 고독을 탄생시킨다.
아이들은 시키지 않아도
말없이 활짝 핀 봄꽃으로 달려가고
고추잠자리는 말없는 가을 햇살을 즐긴다.
나는 지금
눈도 감고 호흡도 가다듬어
침묵의 문을 열어 깊은 진리의 소리를 찾는다.
침묵은 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침묵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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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진리의 목소리
― 허만길 시인의 '침묵'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만길 시인의 시 '침묵'은 말의 부재를 노래하면서도, 실상 가장 웅변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역설적 미학의 정수다.
시인은 ‘말하지 않는 것’ 속에 내재한 깊은 생명성과 존재의 온도를 통해,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온 세계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이는 허 시인의 시 세계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흐르는 삶의 자세이자, 존재의 방식이기도 하다.
시인은 서두에서 단호히 말한다. “침묵은 / 소리 내어 웃지도 울지도 않지만 /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겉으로 고요하지만, 속으로는 거대한 순환을 이어가는 자연의 심장처럼, 침묵 또한 숨 쉬고 있고, 살아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언어보다 더 강력한 울림을 가진다는 선언이다.
그 침묵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독자는 일상의 언어 너머, 그 이면에 존재하는 ‘말 없는 힘’과 조우하게 된다.
허만길 시인은 침묵의 공간을 우주로 확장시킨다. “말없이 무한한 하늘 공간에는 / 별의 빛도 침묵에서 나오고 / 어둠의 신비도 거기서 나온다.” 이 대목은 고요함이 단지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빛을 품고 어둠마저 잉태하는 ‘모태’임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시인의 시선은 늘 우주적이고 근원적이다. 그에게 시는 단지 정서를 그리는 붓이 아니라, 존재의 출처를 향한 질문의 장이다.
침묵은 또 “사막”과 “남극”이라는 극지적 이미지로 재현된다. 시인은 이 두 곳의 침묵을 두려움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사막은 “낙타를 사랑하게” 하고, 남극은 “미끄러운 고독을 탄생”시킨다.
허만길 시인의 독특한 시 세계는 이러한 고요한 공간에서도 생명의 기미를 읽어내고, 비언어적 존재들이 갖는 고유한 서정을 붙잡는다. 자연은 침묵하지만, 시인은 그 침묵에 귀 기울이며 그것이 품고 있는 생명의 목소리를 시로 옮긴다.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아이들과 고추잠자리를 언급한 연이다. “아이들은 시키지 않아도 / 말없이 활짝 핀 봄꽃으로 달려가고 / 고추잠자리는 말없는 가을 햇살을 즐긴다.” 이것은 침묵이 결코 무기력의 표지가 아니라, 존재의 본능에 가장 가깝다는 통찰이다. 말없이 꽃을 찾는 아이, 햇살을 즐기는 잠자리의 모습 속에 시인은 무위(無爲)의 진리를 본다. 그것이 바로 허만길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태도다.
시의 마지막은 시인 자신의 수행적 고백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지금 / 눈도 감고 호흡도 가다듬어 / 침묵의 문을 열어 깊은 진리의 소리를 찾는다.” 이 장면은 마치 한 명상의 구도자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영원의 문턱에 선 장면처럼 숭고하다.
침묵은 여기서 단순한 ‘비언어’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는 관문이며, 인간을 깊게 만드는 정신의 뿌리다.
허만길 시인은 언제나 그랬다. 시끄럽고 번쩍이는 문장의 자극보다, 낮고 잔잔한 언어를 통해 삶을 붙든다. 그의 시는 쉽게 고조되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격정의 절정이 아닌, 고요의 밑바닥에서 진실을 건져 올리는 그의 시편들은 한 편 한 편이 마치 호흡 깊은 수묵화처럼 존재한다.
'침묵'은 그러한 허 시인의 시 세계를 가장 단정하고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결정체다. 침묵은 허공이 아니라 충만이며, 무言은 무의미가 아니라 무한이다. 침묵은 허무가 아니라 진리의 수신 상태다.
이 시는 우리에게 ‘침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침묵 속을 걸어보라고 손 내민다. 그리고 그 손을 잡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가장 또렷한 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세상의 소음이 아닌, 존재의 중심에서 울려 나오는 진리의 맥박이다.
허만길 시인의 침묵은, 시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맑고 고요한 높이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