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동 시인의 '비닐'을 중심으로 ㅡ청람 김왕식

김왕식


□ 이오동 시인







비닐

시인 이오동


그녀는 가림막이다
가볍고 얇고 찢어지기 쉬운 그래서 가리기에는 턱없이 약해
펄럭이며 떨기만 했을
담 아닌 담

쉬지 않고 흔들어대는
무색의 힘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들과 팽팽히 맞서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공정하지 못한 치우친 손길에
상처받은 마음을 밀봉하고

속까지 다 드러낸 그녀가
부르르 온몸으로 버텨 보지만 난도질에 찢긴다

한번 받은 상처는
상처보다 더 큰 편견의 구멍을 만든다

보이지 않는 바람 소리에도 파문이 일고 있다








사물로 존재하는 인간의 초상
― 이오동 시인의 '비닐'을 중심으로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오동 시인의 시 '비닐'은 단지 소재를 빌린 사물시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낮고 흔하며 가벼운 존재로 인간의 상처를 대변하고, 보이지 않는 힘에 맞서는 존재의 의연함을 말없이 증언하는 시적 초상화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비닐’이라는 사물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자화상을 읽고, 시인이 견지한 삶의 미학과 사유의 깊이를 만난다.

‘그녀는 가림막이다’로 시작하는 첫 행은 비닐을 ‘그녀’로 의인화함으로써 이 사물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감정을 지닌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구절들—‘가볍고 얇고 찢어지기 쉬운’—은 비닐의 물리적 성질이지만, 동시에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연약함과 고독을 암시한다. 특히 ‘펄럭이며 떨기만 했을 / 담 아닌 담’이라는 구절은, 무언가를 막는 듯하지만 결코 견고하지 못한 이중성, 억압과 방어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자아를 시적으로 상징한다. 시인은 단지 사물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인간 내면의 불안과 저항을 포착해 낸다.

‘무색의 힘’이라는 표현은 비닐이 가진 투명성—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을 드러내며, 이는 보이지 않는 차별과 폭력, 편견과 무시에 대한 상징적 저항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의 구절은 시인이 사물을 통해 감추어진 진실, 즉 외면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함을 드러낸다. 이는 그의 시가 늘 사소한 것에서 본질을 찾고,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시적 웅변을 길어 올리는 이유다.

중반부의 “공정하지 못한 치우친 손길에 / 상처받은 마음을 밀봉하고”는 비닐이 상처를 감추는 보호막이자 또 다른 억압의 대상임을 동시에 암시한다. 비닐은 감싸고 숨기지만, 그 투명성은 오히려 더 깊은 노출과 상처를 낳는다. “난도질에 찢긴다”는 표현은 단순한 물리적 손상 이상의 것을 내포한다. 이는 이 시대의 수많은 ‘그녀들’이 사회적 편견과 비난, 폭력에 의해 찢기고 훼손되는 현실을 에둘러 고발한다.

“한번 받은 상처는 / 상처보다 더 큰 편견의 구멍을 만든다”는 구절은 이 시의 백미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상처가 단지 통증으로 끝나지 않고 ‘구멍’—즉 존엄의 결여와 불신의 틈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조명한다. 이오동 시인은 삶의 구체적 체험에서 언어의 은유를 길어 올리는 작가다. 그의 시에는 결코 꾸미지 않은 진실이 있다. 감정의 과장이나 기교적 수사보다 오히려 투명한 시선과 침묵에 가까운 직관이 있다. 그것이 이 시를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다.

마지막 연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 소리에도 / 파문이 일고 있다”는 구절은, 존재를 흔드는 것은 거대한 폭력보다 미세한 균열이라는 통찰을 전한다. 이 파문은 결국 시인의 마음 안에서 생겨난 진동이며, 그것은 시적 언어로 번역되어 우리 독자에게 도달한다. 이오동 시의 본질은 바로 거기 있다. 작은 것을 크게 보고, 약한 것을 깊이 보는 시선, 그리하여 삶과 인간에 대한 애틋한 연민과 존중을 언어화하는 시적 윤리.

이오동 시인은 늘 주변을 주목한다. 그 주변이란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자들,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물들, 상처받고도 말하지 못하는 ‘그녀’들이다. 그는 따뜻한 손으로 사물의 맥박을 짚고, 조용한 언어로 고통의 이름을 불러낸다. '비닐'은 그런 그의 시 세계가 응축된 대표작이다. 그의 시를 통해 우리는 사물에 가려진 인간을 보고, 그 인간이 견뎌온 생의 투명한 고통을 듣게 된다.

이 시는, 가볍고 흔한 존재 하나에도 온 우주적 의미를 새겨 넣는 이오동 시인의 섬세하고 따뜻한 세계관의 결정체이다. 투명한 언어로 인간의 깊이를 조명하는 그 문학적 태도야말로, 우리가 문학을 통해 얻는 가장 귀한 감동이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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