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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십자가」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왕식






십자가



시인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ㅡ조용한 피, 고요한 불꽃으로 피어난 순결한 죽음의 미학



문학평론가 김왕식



윤동주의 시 「십자가」는 고난을 통해 구원을 바라보는 시인의 내면적 비상(飛翔)이자, 죽음과 생명, 절망과 소망의 경계에서 염결한 정신으로 써 내려간 존재의 기록이다. 이 시는 단지 기독교적 상징을 차용한 종교시가 아니라, 시대의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을 조용히 소멸시키며, 영혼의 순결함을 지켜내려는 한 청년의 문학적 유언과도 같다. 그에게 십자가는 도피의 대상이 아니라, 도달해야 할 ‘아름다운 패배’였고, 동시에 살아 있음의 증명이었다.

첫 연,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시인은 일상의 찬란한 빛으로 다가오던 햇빛이 교회당 꼭대기, 즉 십자가에 ‘걸려버렸다’고 말한다. 여기서 ‘쫓아오던’이라는 표현은 그 햇빛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마치 시인을 따라오는 인생의 어떤 의미, 곧 진리 혹은 구원에 가까운 빛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빛은 교회당의 첨탑 위에 멈춰서 더 이상 시인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는 곧 삶의 길목에서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구원의 거리감, 인간의 무력한 위치를 절묘하게 포착한 표현이다. 첨탑은 높고, 종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시인은 그 아래에서 서성거릴 뿐이다. 이는 현실의 고통 속에서 아무리 신을 향해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영적 거리감을 시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절망 속에서 체념하지 않는다. 그는 그 아래에서 휘파람을 불며 ‘서성거린다.’ 이 무심한 몸짓 속에는 불안한 시대에 처한 청년 윤동주의 체념과 고독, 그러나 그것을 억누르는 내면의 고요한 저항이 배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여기서 그는 고통과 죽음을 단순한 비극이 아닌, ‘허락된 은혜’로 받아들인다. 십자가는 예수에게 고난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순종의 자취였다. 윤동주는 바로 그 예수처럼 자기 삶이 어떤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허락된 길이라면 조용히 감내하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은유한다. 이는 ‘강요된 죽음’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고통’이라는 점에서 윤동주의 숭고한 미의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장 절절한 결의의 구절이 이어진다.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부분은 문학사적으로도 가장 아름답고 비극적인 죽음의 서사다.
‘모가지를 드리우고’라는 구절은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며, ‘꽃처럼 피어나는 피’는 그의 고통이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음을 암시한다. 피조차도 ‘꽃’으로 승화시키는 이 감정은 윤동주가 고통의 형상조차도 시적 이미지로 정화시키는 시인임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어두워 가는 하늘 밑’은 시대의 상징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조국은 암흑 속에 있었고, 언어와 양심이 짓밟히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그 어둠 속에 ‘피를 흘리며 꽃을 피운다’는 표현으로, 고난 속에서도 인간다움과 시인의 본분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을 차용하면서도, 그 너머의 인간적인 구속과 해방, 고난의 내면화, 순결한 자기희생의 정신을 품고 있다. 그것은 결코 격렬하지 않지만, 더욱 뜨겁다.

윤동주는 이 시에서 삶을 의심하지 않았고, 죽음을 미화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존재가 시대의 어둠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장 고요하고 절제된 언어로 말했을 뿐이다. 그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세우지 않았다. 다만, ‘허락된다면’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 겸손이, 윤동주라는 시인의 위엄이었고, 그 침묵이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울림 깊은 외침이었다.

“십자가는 윤동주에게 죽음의 기호가 아니라, 시인의 존재방식이었다.”
그는 피를 흘리며 꽃을 피웠고, 그 꽃은 지금도 이 땅의 어둠 아래에서 가장 환하게 피어 있다.





피처럼 피어난 꽃 한 송이
ㅡ스승과 제자 달삼의 윤동주 〈십자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늦가을의 오후. 산책을 마친 스승과 제자 달삼은 다시 아랫마을 찻방으로 돌아왔다. 짙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던 하늘 아래, 작은 종탑 하나가 멀리 보였다. 그 위에는 작고 검은 십자가 하나가 박혀 있었다.

“스승님, 저 십자가 보이세요?”
달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스승은 찻잔을 들어 따뜻한 김을 불며 말했다.
“보이지. 오늘 윤동주의 ‘십자가’ 시를 읽으면서 딱 저 생각이 났지.”

달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저도요! 오늘 국어 시간에 그 시 읽었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게 네 재능이지.”
스승은 익숙한 농담으로 대꾸했다. 달삼은 슬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왜 시인들은 자꾸 슬퍼하려고 애쓰는 거죠? 이 시도 처음부터 ‘쫓아오던 햇빛’이 교회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다느니… 첨탑은 또 왜 그리 높은 건지… 그냥 다들 좀 쉬면 안 되나요?”

스승은 푸르스름한 차향을 한 모금 마신 뒤, 살짝 고개를 돌렸다.
“달삼아, 윤동주는 ‘쉬지 않기 위해’ 시를 쓴 거야. 숨이 턱에 차오를 때, 숨 쉬듯 쓴 거지.”

“숨 쉬듯 시를 썼다고요?”

“그래. 시는 그에게 피였다. 절망의 시대에 말 한마디조차 마음대로 못 하던 시절. 그의 시는 쉬는 법도, 숨기는 법도 몰랐지.”

달삼은 그제야 종탑 위 십자가를 다시 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그 ‘쫓아오던 햇빛’이란 건 뭔가요? 저는 그 구절이 너무 신기했어요.”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질문이다. 그 햇빛은 윤동주에게 구원의 빛이었겠지. 무언가 따뜻하고, 희망적인 것. 그런데 그게 교회 첨탑 위에 걸려버린 거야. 멈춰버린 거지.”

“구원이… 멈췄다고요?”

“혹은 너무 멀리 떠나가 버렸거나. 첨탑은 높고, 종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러니 그는 그 밑에서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달삼은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사이 햇살 한 줄기, 마침 십자가 꼭대기를 스치고 있었다.

“근데요, 스승님. 그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좀 무서웠어요.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이거요.”

스승은 그 구절을 입술로 따라하듯 읊조렸다.
“응, 시인의 절정이지.”

“근데 진짜 그렇게 죽고 싶었을까요? 피를 꽃처럼 피우면서요?”

스승은 찻잔을 내려놓고, 창가에 놓인 국화 한 송이를 바라보았다.
“달삼아, 윤동주는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의미 있게 살고 싶었던 거야.
그가 말한 ‘피’는 단순한 피가 아니야. 그건 ‘양심’이자 ‘시’고, ‘마음’이고, ‘저항’이지.”

“꽃처럼 피어난 피… 그건 시인의 언어로 태어난 마지막 결심이었겠네요.”

“그렇지. 어떤 이들은 총을 들고 싸우고, 어떤 이들은 펜을 들고 기록하지. 윤동주는 후자였어.
그는 말이 금지된 시대에 ‘말 대신 피로’ 시를 써낸 사람이었단다.”

달삼은 그 말을 곱씹으며 말했다.
“그래서 ‘십자가가 허락된다면’이라고 했군요. 스스로 만든 게 아니라, 주어진 고통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네요?”

스승은 미소 지었다.
“눈치가 빠르군. 윤동주는 고통을 원한 게 아니라, 고통을 피하지 않았던 사람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에 종탑 아래 골목에선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마치 시 속 한 장면처럼.

“스승님, 그런데 저도 요즘 가끔 그런 기분이 들어요.”
달삼이 조용히 말했다.
“어떤 기분이?”

“그냥… 뭔가 마음속에 ‘햇빛’ 같은 게 있었는데, 점점 멀어지는 것 같고…
종소리는 들리지 않고… 휘파람이나 불게 되는 기분이요.”

스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삼아, 그건 아주 좋은 징조다.”

“좋은 징조요?”

“그건 네 안에 윤동주가 있다는 증거지. 너도 지금 ‘서성거리고’ 있잖아.”

“근데… 전 아직 피도 없고, 꽃처럼 피울 용기도 없어요.”

스승은 달삼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꽃은 피고 싶다고 피는 게 아니다. 바람을 견디고, 어둠을 지나야 피어난다.
윤동주도 그랬다. 그의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깨끗한 삶을 살기 위한 결심의 끝이었다.”

달삼은 천천히 수첩을 꺼내 펜을 들었다. 종이 위에 한 줄을 적는다.

“쫓아오던 햇빛은 아직도 저 위에 있다. 나는 그 밑에서 서성거린다.”

스승이 조용히 웃었다.
“달삼아, 그 한 줄이면 충분하다.”

바람이 불고, 십자가에 또 한 번 햇빛이 걸린다.
달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스승님, 오늘은 거울도, 우물도 아니고, 십자가 아래에서 뭔가 내 마음이 좀… 피어난 것 같아요.”

“그래. 그게 바로 윤동주의 시가 가진 힘이지.
소리 없이 피를 흘리며,
조용히 우리 마음속에 꽃을 피우는 힘.”

둘은 찻방 문을 나섰다.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댕그렁 울렸다.
십자가 위엔 여전히 햇빛 한 줄기.
그 밑에서 휘파람 한 소리가 희미하게 퍼지고 있었다.

조용히, 조용히.
그것은 윤동주의 숨결 같았다.




윤동주의 「십자가」, 고요한 결단의 시 – 그가 침묵 속에서 써 내려간 이유와 비하인드 스토리



청람 김왕식



1941년 늦가을, 윤동주는 일본 유학길을 앞두고 있었다. 연희전문 문과 3학년 재학 중이던 그는, 조선인이 조선말로 시를 쓰는 것이 제약받던 시대적 공기 속에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 친구들―정병욱, 강처중, 문익환 등―모두 민족과 문학, 언어에 대한 갈림길에 서 있었고, 윤동주 또한 자신의 정체성과 언어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기에 그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십자가」를 집필한다. 시인은 이 작품을 1941년 11월 20일, 연희전문학 교정 한켠, 교회 종탑이 보이는 뒷길 벤치에서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의 날짜는 정병욱이 보관한 윤동주 시 원고 모음 ‘정병욱 필사본’에 기재되어 있다. 당시 윤동주는 조용한 위기의식 속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시에 직접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1. “쫓아오던 햇빛이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는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의 상징이 교차하는 순간을 담고 있다. 이 시는 단순한 종교적 감상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며 써 내려간 내면의 고백이었다. 당시 연희전문 교정에는 실제로 조그만 예배당과 종탑이 있었고, 윤동주는 수업을 마친 뒤 홀로 그곳 벤치에 앉아 시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그에게 종탑의 십자가는 단순한 조형물이 아닌, 조선의 청년이 넘을 수 없는 시대의 ‘상징’이자 '도달 불가능한 높이'였다.

그는 스스로 말하길 “나는 종소리를 들어도 종이 아니라 하늘을 듣는다”라고 적어놓은 구절이 있을 만큼, 기독교 신앙과 삶의 존재론적 성찰이 겹쳐 있었고, ‘예수의 십자가’는 자신에게 ‘감내해야 할 운명’으로 다가왔다.

2.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의 숨겨진 장면

문헌에 따르면, 윤동주는 종종 저녁 무렵에 연희전문 뒷동산 언덕을 홀로 거닐며 휘파람을 불었다고 한다. 그 습관을 회고한 동문 문익환은 이렇게 증언했다.

“동주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조용히 휘파람을 부는 모습은 곧잘 봤다. 그것이 그의 기도였고, 혼잣말 같았다.”

그 휘파람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자의 저항이었다. 시 속 구절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는 바로 이 실제 습관을 상징적으로 담은 장면이다. 아무도 듣지 않고, 종소리조차 사라진 시대에서 청년 윤동주는 휘파람이라는 비언어로 슬픔을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십자가」와 '죽음의 예감'

윤동주는 「십자가」를 쓸 무렵, 이미 자신이 일본 유학을 떠나는 것에 대해 불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1월, 그는 도시샤 대학에 입학하게 되지만, 같은 해 3월경부터 내심 ‘죽음’을 자주 언급하기 시작한다. 그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남아 있다.

“어두운 하늘 아래, 나는 조용히 사라질 준비를 한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괜찮다.”

이는 단순한 우울감이나 회피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조선어 글쓰기에 대한 통제가 심화되던 상황에서 ‘펜을 꺾을까’ 하는 고민까지 했고, 실제로 도시샤대학에서는 일본어 수업만 제공되었기 때문에 그는 시를 쓸 수 있는 언어조차 빼앗겼다고 느꼈다. 그때 그는 '십자가를 진다'는 이미지를 현실로 떠올리게 된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일본에서 기독교 서적을 구입하던 윤동주가 서점 직원에게 예수전(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룬 일본어 번역본)을 건넸을 때,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 같은 조센징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겠어?”
윤동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서점을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여관방에 돌아와 「십자가」의 일부 구절을 다시 고쳐 적었다고 전해진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이 구절은 그의 자기모순, 슬픔, 고통을 스스로 해석해 낸 결과이며, 단지 종교적 신념의 표현이 아닌, 자기 운명을 은유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였다.

4.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리지 못한 원초적 초안

윤동주의 사후, 절친 정병욱은 그의 유고 시편들을 정리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묶는다. 그런데 정병욱 초고에는 실리지 않은 또 다른 「십자가」 초안이 존재했던 것으로 구술 자료에 남아 있다.

그 초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두려워, 멀리서 바라보는 나는 / 늘 행복한 척, 자유로운 척, 피하지 않았던 척했다.”

이 구절은 본 시에 비해 훨씬 노골적인 자책의 언어다. 윤동주는 아마도 이 문장이 지나치게 ‘자기 비하’적이라 판단해 정식 시로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문장은 윤동주가 왜 「십자가」를 썼는지를 가장 명확히 드러낸다. 그는 ‘피하지 않았던 척’했던 자신의 소극적 침묵을 끝내 부끄러워했고, 시 속에서라도 그 죄의식과 끝까지 마주하고자 했다.

5. 윤동주의 십자가, 죽음을 넘어선 순교의 언어

1943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윤동주의 마지막 시기는 「십자가」를 쓴 2년 후였다. 생애 말기, 그는 이미 간 기능 장애와 심각한 체중 감소로 고통받고 있었고, 수감자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는 “형무소 창살 틈으로 떨어지는 햇빛을 손으로 잡으려 했다”라고 한다. 그는 여전히 ‘쫓아오던 햇빛’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빛은 결국,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멈춘 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피로, 시의 언어로 그 햇빛을 꽃처럼 피워내고자 했다.
그리고 조용히 허락된 고통을 받아들이며, 참된 시인으로서 ‘자신의 십자가’를 감당했다.

윤동주에게 십자가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조용한 의지의 형상이었다.
그것은 어느 거대한 혁명이 아닌, 내면의 윤리적 혁명이었다.
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큰 고백을 했고, 피 흘리지 않고도 꽃처럼 피어나는 한 시인의 죽음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그의 ‘조용한 시’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십자가는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지키는 언어가 되었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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