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자 시인의 '꽃꽂이 연작 18 (분꽃 피는 저녁)'

김왕식








꽃꽂이 연작 18
(분꽃 피는 저녁)



시인 변희자   



      

해 질 녘 마당 한 켠
분꽃을 바라본다

저녁이 되어야
제 마음을 여는 꽃

햇살의 뒷모습을 닮은 듯
연분홍, 노랑, 하양빛
귀걸이로 딸랑 꽃꽂이.
꽃 달린 꽃씨 귀에 꽂으면
수줍음 피어나는 꽃아씨

꽃잎을 톡, 암술을 쏙 뽑아
붉은 입술 꼭 대어 불면
'삐이' 하고 울린다

그 소리는 마음의 편지

분꽃이 내게 온다
저녁의 시작이 되고
어머니의 시간
어머니 분 내음의 그리움
삐이삐 소리로 돌아온다

오늘도 마당을 스치다
분꽃 앞에 잠시 멈추니
꽃잎 속, 어머니 목소리
분꽃 향으로 맞이한다






변희자 시인의 '꽃꽂이 연작 18 (분꽃 피는 저녁)'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변희자 시인의 '꽃꽂이 연작 18 (분꽃 피는 저녁)'은 소박한 꽃 한 송이를 통해 인간 내면의 정서를 깊이 있게 펼쳐 보이는 서정시이다.
특히 ‘분꽃’이라는 낯익은 정원식물을 매개로 삼아 시인은 시간의 흐름, 존재의 고요한 개화, 그리고 사라진 어머니에 대한 회귀적 그리움을 조용히 환기한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자연 관찰을 넘어, 시간과 기억, 존재와 부재, 감각과 감정이 정밀하게 직조된 정서적 풍경화다.

시의 초입부에서 “해 질 녘 마당 한켠 분꽃을 바라본다”는 진술은 공간과 시간의 설정을 잔잔히 열어젖힌다. 분꽃은 해가 저문 뒤에야 피어나는 꽃이다. 이는 곧 ‘저녁에 피는 생명’이라는 시적 역설로 다가오며, 낮보다 밤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의 이면을 상징한다. 낮에는 감추고 있다가 저녁이 되어야 마음을 여는 ‘분꽃’은, 세상과 시간에 내밀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한 존재로 의인화되며, 시인의 내면이나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연분홍, 노랑, 하양빛을 두고 “햇살의 뒷모습을 닮은 듯”이라 표현한 대목은 단순한 색채 묘사에 그치지 않고, 빛의 사라짐 속에 남겨진 여운과 감정을 회화적으로 그려낸다.
“귀걸이로 딸랑 꽃꽂이”라는 구절은 어린 시절 놀이를 연상케 하며, 꽃잎을 장신구 삼던 추억과 분꽃의 아기자기한 미감을 엮는다. ‘수줍은 꽃아씨’의 형상은 시 속의 화자이자, 그 시절 소녀였던 어머니의 환영이기도 하다. 여기서 분꽃은 단지 피어나는 대상이 아닌, 시간을 매단 주술적 매개로서 작동한다.

특히 “꽃잎을 톡, 암술을 쏙 뽑아 / 붉은 입술 꼭 대어 불면 / '삐이' 하고 울린다”는 구절은 이 시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유년기의 놀이처럼 보이는 이 행위는, 사실은 언어 이전의 소통, 입술과 향기, 숨과 기억이 엉겨 있는 매우 감각적인 장면이다. 삐이 울리는 소리는 그저 장난스러운 기교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편지”로 바뀌어, 청각을 통해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신호가 된다. 이는 곧 사라진 어머니와의 교감으로 이어진다.

“분꽃이 내게 온다 / 저녁의 시작이 되고 / 어머니의 시간”이라는 진술에서, 분꽃은 하나의 존재가 아닌 ‘시간 자체’로 확장된다. 어머니의 생애는 저녁의 고요함과 겹쳐지고, 분꽃의 향기와 ‘분 내음’은 향수를 넘어 그리움으로 재탄생한다. “삐이삐 소리로 돌아온다”는 표현은, 시인이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시인을 찾아오는 방식의 시간 인식이다. 그리움은 능동적인 환기와 수동적인 수용 사이에서 분꽃 향기로 피어난다.

마지막 연은 시적 화자의 현재 위치를 다시 한번 자리매김한다. “오늘도 마당을 스치다 / 분꽃 앞에 잠시 멈추니”라는 구절은 일상의 동선 안에서 문득 과거의 감정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의 정지를 보여준다. 분꽃 앞에 멈추는 행위는 단순한 관조가 아니라, 기억과 향기가 교차하는 ‘의식의 지점’이다. “꽃잎 속, 어머니 목소리 / 분꽃 향으로 맞이한다”는 대미는, 존재의 상실을 단정 짓지 않는다. 외려 향기로 귀환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맞이한다’는 표현은 사라짐 너머에 존재하는 교감을 정서적으로 복원한 것이다.

변희자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자연과 인간, 기억과 감각, 시간과 존재를 정교하게 직조해 낸다. 그의 문학적 미의식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나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들과의 내밀한 교신에 있다. 이 시의 핵심은 ‘저녁이 되어야 피는 꽃’이라는 설정에 내포된 시간성과 존재의 의미화이며, 이를 통해 시인은 어머니라는 근원의 이미지와 자신의 내면세계를 조응시킨다.

요컨대, '분꽃 피는 저녁'은 하나의 꽃을 바라보며 기억을 환기하고, 사라진 존재를 다시 맞이하는 애틋한 의식의 시다. 변희자 시인의 시 세계는 자연의 한순간을 붙잡아 인간의 정서를 극도로 농축시키는 서정성에 있으며, 그것은 ‘삐이’ 울리는 분꽃의 작은 소리 속에서 오히려 가장 깊고 넓은 울림으로 번져나간다.
이는 곧, 언어의 한계를 넘는 ‘향기의 문학’이요, 어머니의 자리를 꽃으로 환생시키는 문학적 의식의 결정체라 할 것이다.

ㅡ청람 김왕식





□ 변희자 시인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전홍구 시인의 '다시 별을 읽다'를 읽고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