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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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색
시조시인 효산 남순대
우듬지에 이우는 정적, 하얗게 추억만 남고
지난 여름 우짖던 새의 운문 韻文도 여직 남아
반음씩 내려앉으며 잎새들을 지워간다.
인연도 강줄기 하나 저리 멀리 풀어놓고
산발치 어린 열매 애면글면 품어 안고서
또다시 가야 할 길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영혼이 빠져나갈수록 줄어드는 생애의 무게
씻기는 시간들의 다홍빛 풍장 사이로
하늘은 투명한 연못, 새 그림자 키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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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효산 남순대 작가의 '탐색'
― 생의 허무를 품은 언어의 성찰, 그 투명한 침묵의 미학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효산 남순대 시인의 시조 '탐색'은 정적과 여운의 미학을 바탕으로 존재의 유한성을 껴안고 그것을 언어로 탐색해 나간 절제된 예술의 결정체다.
1998년, 중앙일보 시조지상백일장 연말장원으로 문단에 정식 발을 들인 그의 등단작이자 대표작인 이 작품은, 시인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압축해 보여주는 귀한 서사로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남순대 시조시인의 '탐색'은 생의 이면에 자리한 허무와 존재의 침묵을 단정한 언어로 직조한 걸작이다. 시인은 허망한 찰나와 유한한 생의 흐름을 붙들어, 그 허무조차 언어로 빛나게 만든다. 이 작품은 단순한 감각의 진술이 아니라, 생애 말기의 사색이 어떻게 정제된 언어로 가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성의 결정체이다.
1연의 “우듬지에 이우는 정적”은 가을의 내림이자 생의 쇠미한 지점이다. '정적'은 침묵이 아니다. 삶을 지나온 시간들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머무는 자리에 내려앉은 기척 없는 존재의 형식이다. “하얗게 추억만 남고”라는 구절은 생의 마무리를 암시하면서도, 모든 사라짐이 공허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한 겹의 기억으로 남는다는 은유를 품는다. '우짖던 새의 운문韻文'은 생의 열기와 울림을 상징하며, 이제는 '반음씩' 사라져가는 추억의 잔향이다. ‘반음씩’이라는 표현은 언어의 절제 속에 느린 퇴조를 그려내며, 인생의 퇴장을 그 어떤 오버 없이 섬세하게 보여준다.
2연에서는 인간관계의 흐름이 ‘인연’이라는 단어 아래 ‘강줄기’에 비유된다. 관계는 흐르되,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는 본질이 '저리 멀리 풀어놓고'라는 표현에서 실감된다. 그리고 그 흐름과 대비되는 ‘산발치 어린 열매’를 품는 자세는, 아직도 남은 생의 과제를 향한 인간의 의지로 읽힌다. “애면글면”이라는 부사 하나에 삶의 고투가 다 담겨 있으며, 그것은 곧 ‘또다시 가야 할 길’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때의 시적 자아는 지나온 세월에 매몰되지 않고, 여전히 남은 시간을 지긋이 응시한다. 이는 체념이 아닌, 침묵 속의 용기다.
3연에서 시는 가장 깊은 심연으로 진입한다. “영혼이 빠져나갈수록 줄어드는 생애의 무게”라는 표현은 육체의 쇠락을 넘어, 내면의 ‘비움’을 정적의 미학으로 승화시킨다. 생의 마지막 풍경이 ‘다홍빛 풍장’이라는 은유로 나타나는데, 이는 죽음이 차가운 검정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무리일 수 있음을 말한다. 풍장은 바람에 씻기는 장례로서, 시간과 생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통로다. ‘하늘은 투명한 연못’이라는 구절은, 죽음 이후에도 존재가 남기는 투명한 흔적을 함축한다. 그리고 ‘새 그림자’는 죽음 이후에도 계승될 정신, 혹은 기억의 형상이다.
남순대 시조시인의 삶의 철학은 ‘절제 속의 본질’에 있다. 그는 화려한 언어 대신, 정적의 미학으로 생의 실상을 응시하며, 존재의 무게를 되묻는다. 그가 선택한 시조라는 형식 또한 전통과 현대 사이의 통로이며, 그의 내면이 얼마나 질서 정연한 사유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연과 생애, 인연과 이별, 영혼과 생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어는 결코 소란하지 않다. 그러나 그 침묵은 깊고 단단하며, 결코 공허하지 않다.
남순대 작가의 시조는 생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탐색’이자, 언어가 끝내 다다를 수 있는 최후의 지점에 선 시인의 정직한 기록이다. 시 한 수가 그 어떤 장문의 철학서보다 강력하게 사유를 환기시킬 수 있다면, 그 예는 분명 이 작품일 것이다. 그의 시는 침묵보다 더 투명한 언어로, 생의 끝자락을 노래한다. 그래서 ‘탐색’은 단순한 발견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깊고 고요한 질문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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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순대 시인은 대구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학과를 졸업한 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조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문학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일찍부터 곧고 치열했으며, 그것은 그의 작품 전반에서 드러나는 고요하지만 단단한 시적 밀도로 증명된다.
생의 다짐처럼 무르익은 언어를 문학이라는 그릇에 조용히 담아내는 그의 모습은, 스스로 삶을 겸허히 마주하고 문학을 숨처럼 쉬어온 작가의 철학을 보여준다.
그의 시에는 군더더기 없는 정제된 언어가 있다. 과장된 수사 대신 침묵과 절제의 미학을 택하며, 웅변이 아니라 시선과 숨결로 세계를 응시한다. 「탐색」은 그런 남순대 시인의 정신적 뿌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것은 마치 잎새 하나를 떨구며, 자기 몸을 비워가는 나무의 자세와도 닮아 있다.
이 시는 단지 등단작이라는 의미를 넘어, 시인의 생애를 꿰뚫는 하나의 영적 자화상이자, 문학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조용히 말해주는 삶의 진혼가다. 가볍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한 생애의 무게와 침묵이 고요히 스며든 이 작품은, 시조가 지닌 본래의 깊이와 가능성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정결한 수작秀作이다.
이 한 편의 시조 속엔, 삶의 고통도, 아름다움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조하는 고요한 눈빛도 함께 담겨 있다.
ㅡ 청람 김왕식
□ 효산 남순대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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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