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김영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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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蘭 꽃이 춤을 춘다.
수필가 김영희
두어 달 전 어느 집에서 밖에 화분을 내놓았다.
집을 처분했는지 그 집의 많은 화분이 길거리에 나앉은 것이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겉보기에 화초는 대체로 튼실했다. 주인이 정성껏 가꾼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예전에 키웠던 난초가 생각나서 다시 키우고 싶어졌다. 그중에 난 분이 몇 개 있어서 아까운 마음에 난 분과 산호초 화분을 집으로 가져왔다.
화초가 새로 이사했으니 시원하게 목욕시켜 주고 바람을 느끼라고 베란다에 며칠 두었다. 더 가까이 두고 보고 싶은 마음에 난 분을 거실로 들였다. 어느새 새 촉도 몇 대씩 올라와 빈자리를 채웠다.
며칠 전, 난蘭 한 분에서 마알간 연둣빛 꽃대가 두 대나 올라오더니 꽃망울을 품었다. 몽글몽글 매달리던 연둣빛 몽우리가 점점 부풀면서 옅은 분홍빛으로 변신한다. 몸집을 불리던 분홍 꽃봉오리가 더는 버틸 수 없었는지 그만 탁! 하고 벌어졌다. 가늘게 벌어진 틈 사이로 향기를 쏟으며 모습을 드러낼 꽃잎이 궁금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가가 벌어진 틈을 살핀다. 언제쯤 꽃잎을 열까.
난蘭도 더웠는지 점점 불리던 꽃봉오리를 두 송이씩 연달아 터뜨렸다.
탁! 탁! 수줍게 숙인 고개를 살포시 든다. 반가운 마음에 꽃에 가까이 코를 대고 향기를 들숨으로 내 몸에 들여보낸다. 온몸에 난향이 퍼진다. 아! 향기로운 꽃이여! 가녀린 연둣빛 꽃에서 난향이 온 집안에 퍼져나간다. 이 뜨거운 여름, 은은한 난향에 지친 몸이 다시 살아난다. 연신 땀을 흘리고 있는 난. 보고 또 보고 또 가까이 다가간다.
난꽃이 춤을 춘다. 연두 바탕에 자주 수를 놓은 듯 찬란히 빛나는 자태. 수줍어 고개 숙인 난꽃이여. 며칠 사이로 연달아 꽃잎을 펼친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듯 우아하다.
난꽃이 춤을 춘다. 연두에 자줏빛 줄무늬를 두른 꽃이 흥에 겨워 두 팔을 벌리고, 날렵한 버선 끝으로 다섯 장 꽃잎은 장구 장단에 맞춰 춤사위를 펼친다. 한 대에는 네 송이가 또 한 대에는 일곱 송이가 차례로 일어난다. 난꽃이 연두 바탕에 자주색 옷고름을 드리운 고운 한복 차림으로 춤을 춘다. 각기 다른 몸동작. 흥에 겨운 한마당 잔치가 벌어졌다. 얼씨구 좋다.
난꽃이 훨훨 난다. 꽃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큰 발동작으로 훨훨 날아 허공에 제 모습을 새기며 나비가 된다. 줄을 이어 날아가는 모습. 내 눈앞에서 네 마리, 일곱 마리 모두 한 줄로 날아간다. 비상飛翔을 꿈꾸는 난꽃.
인위적인 향은 코를 자극하고 뇌를 흔들어 심란해지지만, 자연의 향기는 은은하게 온몸으로 스며들어 심신을 편안하게 해 준다. 온몸에 난향이 깊숙하게 배인다.
나도 어느새 한 마리 나비가 된 듯.
아! 이 뜨거운 여름, 난 꽃이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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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 나비가 되어 피어나는 삶의 찬가
— 김영희 수필 '난꽃이 춤을 춘다'
난향처럼 스며드는 생의 미학, 그리고 장주지몽의 서정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영희 수필가의 '난꽃이 춤을 춘다'는 단지 한 송이 꽃이 피는 순간을 기록한 글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찰나의 환희, 나와 세계가 하나 되는 무아(無我)의 순간을 포착한 문학적 장면이다. 길가에 놓인 버려진 난 분을 거두는 행위에서 시작되는 이 수필은, 꽃과 함께 살아가는 한 인간의 따뜻한 손길이자, 사소한 일상에서 우주의 섭리를 깨우는 내면의 문장이다.
수필의 초입은 “아까운 마음”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작가는 사라진 주인의 흔적을 품은 난 분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조각을 거두는 손이며, 삶의 부재 속에서 새 숨을 불어넣는 시인의 태도이다. 단지 식물을 거두는 일이 아니라, 이 세상에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여겨진 존재에 존엄을 부여하는 일. 김영희 작가의 문학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빛난다.
작품은 곧 생명의 미세한 감각에 집중한다. 꽃대가 오르고, 연둣빛에서 분홍으로, 자줏빛으로 피어나는 그 변화는 자연의 기적이자, 생의 본질에 대한 섬세한 묘사다. 하지만 이 글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유는, 그 변화 앞에서 작가가 단지 관찰자가 아니라 ‘함께 피어나는 존재’로서 거듭난다는 점이다. “온몸에 난향이 퍼진다”는 고백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자연과 나의 경계가 허물어진 자각의 언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장자의 ‘胡蝶之夢’을 떠올리게 된다.
장자는 말했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흥겨이 날아다녔다. 나중에 깨어보니 장주였다. 그러나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김영희 작가의 글은 그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난꽃이 춤을 추는 순간, 그녀는 어느새 나비가 되어 허공을 유영하고 있다. 꽃을 보고 감탄하던 사람이, 그 향기를 들이마시고, 마침내 꽃과 한 몸이 되어 비상한다. 수필의 마지막 문장 “나도 어느새 한 마리 나비가 된 듯”은 단지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장자의 사유처럼 ‘현실과 꿈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문학적 비상이다.
난꽃은 고운 한복을 입고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작가는 그 옆에서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살아 있는 존재의 기쁨을 체현한다. 이 우아한 합일은 곧 ‘나와 너’, ‘자연과 인간’, ‘객관과 주관’의 모든 분리가 허물어진 자리에 있다. 그렇게 꽃과 사람이 하나 되어 춤추는 풍경은, 장자가 말하던 ‘진정한 자유’의 상태, 즉 物我一體의 정점이다.
김영희 작가의 삶의 철학은 어쩌면 여기서 분명해진다. 그것은 ‘돌봄’과 ‘동화’ 그리고 ‘경외’로 요약될 수 있다. 버려진 난 분을 거두는 손길은 타인을 위한 마음이요, 꽃잎 하나에도 깊은 숨결을 느끼는 감성은 세계와의 조용한 공명이다. 그녀는 이 수필을 통해 말한다. 삶은 반드시 거창한 무대에서만 반짝이지 않는다고. 베란다 한켠, 난꽃 한 송이에도 우주가 깃들고, 한 여름의 향기에도 꿈처럼 날아오를 수 있다고.
'난꽃이 춤을 춘다'는 단지 아름다운 산문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 육체와 영혼, 꿈과 현실이 하나로 뒤섞이는, 장자의 나비가 다시 피어난 오늘의 수필이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꽃이 춤을 춘 것인가, 김영희가 꽃이 되어 춤을 춘 것인가.”
그러나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춤이 얼마나 우아했으며, 그 순간이 얼마나 진실했는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난꽃이 춤을 추는 그 찰나, 김영희라는 존재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연둣빛 꿈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 꿈은 곧, 우리가 잊고 있던 삶의 아름다움이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