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기 위에 핀 별 하나 ㅡ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청람







댕기 위에 핀 별 하나




시인 청람 김왕식




댕기 풀던 날, 달이 졌다
지문 없는 밤, 별도 숨고
유년의 살결, 짐승 밟다

절기조차 짓눌린 땅
아비는 지도 들고 떨다
딸 손은 별을 더듬었다

열네 해 꽃망울 소녀
침묵 속에 신부가 되고
스무 해 겨우 채우기 전

아이 안은 손이 떨려
숨보다 가벼운 운명
그 품에 무게를 배웠다

결혼은 시작이 아니고
국경 없는 망명의 문턱
희망조차 검문을 받다

소꿉장난도 사치였다
분홍 꿈은 군홧발 밟히고
달빛은 뒤켠에 쫓겨났다

한 몸에 실핏줄처럼
민족의 궤적이 흘렀고
한마디 말조차 삼켰다

지도에 없는 집들마다
이름 없는 꽃이 졌고
그 꽃은 다 엄마였다

외할배 발꿈치에 밴 땀
도피란 이름의 기도
숨은 들숨만이 아니었다

이 땅의 숨결은 도망쳤고
어미의 젖은 피로 말랐다
한 움큼 모국어 사라졌다

“정신대”란 어둠 속에
빛보다 빠르게 끌려가던
이웃의 언니는 돌아오지 못했다

시베리아의 얼음 사이
한 마디 이름조차 얼고
몸보다 먼저 마음이 죽었다

그러나, 봐라. 아직 있다
댕기 위에 묶은 매듭
그 하나에 조국이 실렸다

문지방마다 쪽빛 물들
옥양목 위의 유전자
잊힌 역사, 아직도 숨 쉰다

세계여, 귀를 기울여라
이 시는 울 엄마 이야기
그러나 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류의 어머니, 꽃 진 여인
그 한숨이 바다를 넘고
별 하나 되어 눈을 밝힌다

붉은 댕기 끝 매달린
하늘조차 울먹이며
이제야 묻는다, 다시

그대는 누구의 딸인가
그대는 누구의 역사인가
그대는,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


■□
댕기 하나에 스민 역사



청람 김왕식



내 어머니는 열네 살이었다. 댕기를 풀기에도 이른 나이였다. 그러나 조선의 땅에선 꿈보다 현실이 먼저 피어야 했다. 왜놈의 발굽이 골목마다 휘젓고, 정조보다 생존이 앞섰던 시절. 내 외할아버지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만주의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렇게 국경을 넘었다. 그 피난길이 바로 조선의 자화상이었다. 아무도 몰래,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길을 침묵과 눈물로 건너야 했던 그 시절.

어머니는 스무 살도 되기 전, 아이를 낳았다. 혼례도 없었고, 신부 수업도 받지 못한 소녀가, 거친 손으로 젖을 짜고, 아이의 울음에 맞춰 숨을 쉬었다. 나는 그 품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 품이 얼마나 많은 역사의 울음을 삼켰는지, 나는 너무 늦게야 알았다. 어머니는 밤마다 불을 끄면 오래된 이불을 덮고도 벌벌 떨었다. 문득 눈을 뜨고 앉아 외할아버지를 찾곤 했다. 불현듯 ‘만주’라는 말에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시를 쓰며 어머니의 흔적을 찾았다. 그녀는 이름 없는 꽃처럼 살았다. 어디에도 이름이 남지 않았고, 그 생애는 오직 가족의 피로 이어졌다. 그녀의 댕기는 한민족의 매듭이었고, 그녀의 떨리는 숨결은 지워진 언어였다. 나는 그 댕기를 시로 엮고, 그 숨결을 글로 붙잡는다. 피멍 든 손등 위에 쪽빛이 스며들듯, 내 문장마다 어머니의 그림자가 스민다.

세상은 늘 강한 자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나는 약한 자의 숨결로, 지워진 이름들로 역사를 다시 쓰고 싶다. 내 어머니는 책 한 권 쓰지 않았지만, 평생을 온몸으로 써 내려간 존재였다. 그 생애는 피로 쓰인 시였고, 고통으로 수 놓인 산문이었다. 나는 그 시의 유일한 독자이자, 유일한 후손이었다.

문득 문풍지 너머 겨울바람이 스치듯, 어머니의 삶도 그렇게 내 가슴을 스쳐간다. 나는 언젠가 그 바람의 방향을 따라, 어머니의 고요한 눈빛에 다시 닿고 싶다. 그녀가 내게 남긴 마지막 유산은 단 한 마디였다.

“아가야, 우리는 말보다 먼저 울었단다.”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아니, 시마다 새기고 살아갈 것이다. 댕기 하나에 스민 민족의 기억, 그 길 위에 핀 별 하나로 어머니를,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들을, 다시 하늘에 띄워 보낸다.

역사는 피를 말린 자들의 기록이 아니다. 피를 토하고도 침묵한 자들의, 이름조차 지워진 자들의 소리 없는 기록이다. 나는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시를 쓴다. 어머니의 댕기처럼, 한 줄 한 줄, 조심스레 매듭짓는다.


ㅡ 청람 김왕식





□■


숨결로 쓴 역사, 댕기로 묶은 시

― 청람 김왕식의 문학정신에 대한 총평



문학평론가 김기량




청람 김왕식의 시와 산문은 한 개인의 고백을 넘어서 민족사의 어둠을 등불처럼 밝히는 기록이다. 「댕기 위에 핀 별 하나」는 단지 한 편의 시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살아낸 시대, 그의 어머니가 온몸으로 견뎌낸 침묵의 세월을 오롯이 껴안은 문학적 제의(祭儀)이며, 소리 없는 자들의 언어를 회복하는 존재의 윤리다.

그의 시는 유려한 수사보다 피멍 든 언어의 진실성으로 독자를 흔든다. “댕기 풀던 날, 달이 졌다”는 첫 구절부터 시인은 역사의 무대에서 가장 약하고 투명했던 존재들을 소환한다. 달과 별, 댕기와 살결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민족 여성의 운명과 존엄, 그리고 그 이름 없는 생애에 대한 경외다. 그는 그 ‘지문 없는 밤’ 속에서 ‘딸 손은 별을 더듬었다’고 썼다. 여기서 별은 단순한 희망의 상징이 아니라, 사라진 이름, 말해지지 못한 기억의 상징이다.

청람의 문학에는 언제나 침묵하는 자를 위한 시선이 있다. 역사는 권력자의 언어로 기술되지만, 그는 고통받은 자의 침묵을 문장으로 새기는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는 열네 살에 댕기를 풀었고, 스무 해를 채우기도 전에 아이를 안았다. 세상은 이 삶을 ‘소녀 가장’이 아닌 ‘조용한 어머니’라 불렀지만, 김왕식은 그 침묵을 ‘피로 쓰인 시’라 명명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의 문학은 한 개인의 효심이나 회상을 넘어 존엄의 복권을 이뤄낸다.

산문 「댕기 하나에 스민 역사」에서 그는 어머니의 삶을 “피멍 든 손등 위에 쪽빛이 스며들듯” 시로 기록한다고 했다. 이 한 문장은 그의 전 작품 세계를 꿰뚫는 미의식과 철학의 정수다. 그는 상처를 미화하지 않되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시로 정화하고, 기억으로 봉헌한다. 그의 시는 절규가 아니라 침묵의 파문이다. 언어의 맨 끝자락에 놓인 이들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함께 건너는 윤리적 행위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의 문학이 모성에 대한 단순한 미화를 넘어서, 모성을 둘러싼 역사적 강제성과 사회적 구조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혼은 시작이 아니고 / 국경 없는 망명의 문턱”이라는 시구는, 어머니의 인생을 가로막은 현실을 한 줄로 압축하는 동시에, 억압된 여성사와 민족사의 교차지점을 드러낸다. 청람은 이 교차로에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문학의 길을 묵묵히 걷는다.

김왕식의 시는 길이 남는다. 그것은 외치는 문장이 아니라, 묵상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말보다 먼저 울었다’는 어머니의 유언 같은 한마디는 그 어떤 시구보다 깊고 절실하다. 그는 이 말을 자신의 삶에 새기고, 그 문장 하나로 시의 매듭을 묶는다. 댕기처럼, 한 줄 한 줄 조심스레. 그가 문학으로 하고자 한 일은 시가 슬픔을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 속에서 존엄을 되찾는 일이었다.

결국 청람 김왕식의 문학은 ‘사람을 위한 시’이다. 잊힌 이의 이름을 부르고, 외면당한 역사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는 한 시인의 자리에서 민족과 인간, 기억과 윤리의 길잡이가 된다. 「댕기 위에 핀 별 하나」는 단지 한 어머니의 시가 아니라, 인류의 이름 없는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불멸의 노래다. 그 노래는 낮은 곳에서 피어나 별이 되고, 우리는 그 빛을 따라 잊지 않아야 할 기억과 다시 만나게 된다.

김왕식의 시는 오늘, 침묵 위에 피어나는 별이다.
그 별 하나가 온 세계의 하늘을 밝혀줄 것이다.



ㅡ 문학평론가 김기량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근모 시인의 '고려인'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