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초 시인 「녹음 첩첩. 2」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왕식







녹음 첩첩. 2


시인 안혜초




꽃 한 번 아름다이
피워내지 못하면서
열매 한 번 탐스러이
맺어보지 못하면서
잎새만큼은 제철 맞아
푸르러이 푸르러이
그래도 그분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그래도 세상은
살아볼 만한 거라고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나
후려치는
비바람 속에서나





안혜초 시인의 「녹음 첩첩. 2」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안혜초 시인의 「녹음 첩첩. 2」는 한 생애의 성찰이자, 인간 존재의 겸허함을 담은 아름다운 여운의 시편이다.
이 시는 “꽃도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잎새만큼은 제철 맞아 푸르다”는 표현을 통해, 거창한 성과 없이도 묵묵히 살아낸 존재의 존엄을 노래한다. 단정하고 절제된 언어 속에, 시인은 자신의 삶을 통과한 진실한 고백과 감사의 기도를 눌러 담는다.

첫 행부터 시인은 스스로를 ‘꽃 한 번 피우지 못한 존재’로 규정한다. 이는 단지 실제의 식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주목받는 순간이나 눈부신 성취를 얻지 못한 자신 혹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비유한 말이다. “열매 한 번 탐스러이 맺어보지 못하면서”라는 대목 역시 인생의 결과물로 여겨지는 성공, 명예, 보람과는 거리가 먼 소외된 삶의 자리를 정직하게 직면하는 것이다.

이 시의 힘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꽃도 열매도 없지만 “잎새만큼은 제철 맞아 푸르러이 푸르러이” — 이 구절은 안혜초 시인 특유의 겸허한 관조의 미학이 집약된 대목이다. 잎새는 보통 꽃과 열매처럼 주목받지 않는다. 그러나 잎은 생명을 지탱하는 광합성의 자리이며, 어느 계절에도 자기 몫을 충실히 수행하는 존재다.
시인은 그 보이지 않는 성실과 푸름의 가치를 ‘잎새’에 이입함으로써, 눈에 띄지 않아도 자기 존재를 다한 삶의 태도를 숭고하게 끌어올린다.

그런 존재로 살아낸 시인은 “그래도 그분께 감사드려야 한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그분’은 단지 종교적 존재를 의미하는 신(神)을 넘어서, 삶 자체, 혹은 자연과 우주의 질서 그 자체에 대한 경외의 표현으로 읽힌다. 눈부시지 않았지만 제 나름의 푸름으로 살아낸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한 가장 단정한 방식의 인사이자, 존재의 예礼이다.

시인은 또한 “그래도 세상은 살아볼 만한 거라고” 말한다. 이 대목은 이 시의 정조를 결정짓는 핵심 구절이다. ‘그래도’라는 부사는 반복되며, 절망과 고통, 상실의 세계 너머로 나아가려는 시인의 내면의 저력을 암시한다.
시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끝내 희망을 유보하지 않는다. 안혜초 시인의 시세계가 지닌 단단하고 조용한 긍정의 미학이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끝 구절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나 / 후려치는 비바람 속에서나”는 이 시를 시간의 흐름, 삶의 전체 서사로 확장시킨다. 이는 마치 인생의 계절을 관통한 뒤, 시인이 내놓는 고요한 종합적 성찰처럼 느껴진다. 빛날 때나 꺾일 때나, 삶은 여전히 견딜 만한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바로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비움과 수용의 철학이다.

안혜초 시인의 작품 세계는 언제나 외침보다 침묵을 통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그는 화려한 수사를 쓰지 않지만,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진실하고 맑으며, 무엇보다 따뜻하다.
그의 시는 ‘설명’이 아닌 ‘느낌’으로 독자에게 다가오고, ‘위로’가 아닌 ‘함께 앉아 있음’으로 마음에 머문다.

「녹음 첩첩. 2」는 일상과 자연, 그 속의 자기 존재를 투명하게 응시한 시인의 내면이 빚어낸 영혼의 푸른 잎새 한 장이다.
이 시는, 꽃보다 잎이 아름답고, 말보다 침묵이 깊은 삶의 진정한 시편(詩篇)이라 말할 수 있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안혜초 시인





keyword
작가의 이전글주광일 시인의 시 '장미꽃밭에서'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