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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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 알을 깨고 나오는 현대의 자아를 위하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단지 한 청년의 성장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기 내면의 세계로 어떻게 진입하며, 그 속의 빛과 어둠을 하나의 얼굴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통스럽게 가르쳐주는 정신의 탐험기다. 이 작품에서 가장 심오하고도 치명적인 상징이 바로 ‘아브락사스’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나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이 문장은 외형상은 단순한 우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간의 존재론적 단절과 변신의 선언문이다. 여기서 ‘알’은 안정된 세계, 익숙한 가치, 부모가 만들어놓은 도덕과 사회 질서, 종교의 규율과 같은 틀을 상징한다. 그 안은 따뜻하지만, 닫혀 있다.
진정한 자아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알을 깨야 한다.
그 깨지는 소리의 고통은,
한 인간이 ‘성숙해 가는 소리’다.
이 상징은 현대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오늘 우리는 어떤 알 속에 있는가?
제도화된 교육, 획일화된 미디어, 남들이 말하는 ‘정답’들—
그것이 나의 진짜 이름이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가야 한다.
아브락사스는 신화의 이름이 아니다.
그는 야훼처럼 절대적인 선의 얼굴도 아니고,
사탄처럼 완전한 악의 얼굴도 아니다.
그는 선과 악, 빛과 어둠, 성스러움과 추악함,
사랑과 죄를 하나로 품는 존재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인정하는 신’이다.
그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으며,
모순조차 껴안는 신이다.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만난 아브락사스는
‘완전함의 거울’이 아니라,
‘모순을 살아내는 인간의 초상’이었다.
그 안에서 그는 쾌락도 경험하고, 공포도 지나며,
성스러움과 욕망 사이를 오가면서
비로소 ‘자신’이라는 존재의 뿌리에 닿게 된다.
오늘의 우리는 이 아브락사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우리 안의 ‘양면성’을 부정하지 않는 용기다.
늘 착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 안의 그림자,
나의 질투, 미움, 탐욕조차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러면서도 그 어둠에 무너지지 않고,
빛과 함께 그것마저 이끌어가는 삶의 태도.
아브락사스는 말한다.
“내게 와라. 나를 믿으라. 그러나 나를 숭배하지는 마라.
네 안에 나를 발견하라.”
그 말은 종교나 윤리의 경계 너머,
한 인간의 ‘전인적 존재’를 회복하는 선언이다.
자기 안의 약함과 강함,
순결과 음욕, 슬픔과 기쁨을
선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성숙의 시작이 된다.
따라서 아브락사스는
도피가 아니라 직면의 상징이며,
회피가 아니라 통합의 이름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신은,
세상을 나누는 신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
새로 태어나게 하는 신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스스로 묻는다.
“지금 나는 어떤 알 속에 있는가?”
그 알을 깰 준비가 되었는가?
나의 빛과 어둠,
모든 것을 껴안은 날개로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갈 준비가 되었는가?
그 물음 앞에 선 자만이
비로소,
자기 삶의 진짜 이름을
되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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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삭스(ABPAEA=. Abrasax)는 기원후 2세기의 나스티시즘 교부였던 바실리데스의 철학 체계에서 사용된 낱말로 신비적인 의미를 띠는 낱말이다. 아브라삭스는 때로는 아브락사스(ABPA=AE.Abraxas)라고도한다. 이들 중 전자의 낱말이 후자보다 훨씬 더 자주 사용되었다. 바실리데스의 나스티시즘 철학 체계에서, 아브라삭스는 365 영역들의 수장인 대아르콘(GreatArchon)이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