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ㅡ 김어준
□ 김어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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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이라는 현상
― 말의 용기, 공감의 기술, 그리고 상생의 메시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어준은 이름 석 자만으로 찬반이 분분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진영의 사람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중요한 본질을 놓치게 된다. 그는 시대의 단면을 뚫고 나온 하나의 실험이었고, 무엇보다 보통 사람의 목소리에 기울였던 기획자였다. 그가 던졌던 언어들은, 마이크를 가질 수 없었던 이들의 감정과 의문에 귀 기울인 결과였다.
그의 첫 등장은 1998년 ‘딴지일보’를 통해 이뤄졌다. 당시 그는 대중과 언론 사이에 낀 억압된 침묵을 해학과 패러디로 풀어내며, 소시민의 울분과 소외를 대변하는 대안 언론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겉으로는 가볍고 장난스러웠지만, 그 속에는 권력의 단단한 벽에 균열을 내려는 진지한 기획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는 기성 언론이 다루지 않던 일상의 그림자를 조명했다.
‘나는 꼼수다’는 이러한 흐름을 본격화했다. 이명박 정권 시절, 공식 언론이 침묵하던 순간에도 그는 웃음 속에 진실을 숨겨 시민들과 공유했다. 화법은 다소 과격했고 표현은 불편할 수 있었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겪는 현실을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는 공정한 분노가 있었다. 그는 상아탑 위의 지식인이 아닌, 거리의 방송인으로, 대중의 삶과 결합하려 애썼다.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그 정점이었다. 그는 뉴스의 형식을 유쾌하게 파괴하며, 권위적 구도의 언론이 외면한 민생의 언어를 들려주었다. 노동자, 약자, 여성, 청년, 그리고 소상공인의 이야기를 ‘뉴스’라는 무대에 끌어올렸다. 정보 전달보다는, 정서적 위로와 사회적 공감을 추구한 새로운 공론장이었다.
물론 그의 언어가 늘 정제되거나 중립적이진 않았다. 때로는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자신의 논리를 밀어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완성된 해답을 제시하려는 자가 아니었다. 갈등을 드러내고 질문을 제기하는 ‘시작점’의 사람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스스로의 오류를 기꺼이 노출시키는 용기를 가진 존재였다.
그는 강한 진영 논리에 갇히기보다, 진영 바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안을 언어로 변환하는 번역자였다. 지식과 유머, 비판과 대중성, 그리고 도전과 실험이라는 가치가 그 언어의 밑바탕을 이뤘다.
무엇보다도 김어준의 여정에는 늘 ‘소외된 다수’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거대한 시스템에서 배제된 사람들, 목소리를 잃은 이들, 체제 안에서 가려진 고통에 귀 기울이려는 의지가 그의 방송 전반에 흐른다. 그리고 이 모든 노력은 결국, 함께 살아가는 세상, 즉 ‘공동선’을 향한 실천이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험자였으며, 모두를 위한 상생의 언어를 끌어내려는 도전가였다. 때론 과했고, 때론 편향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획은 늘 사람을 향했고, 중심엔 ‘우리’가 있었다.
모든 현상은 시간 속에서 낡아지거나 진화한다. 김어준이라는 이름 역시, 하나의 '사건'으로 머무르지 않고 변화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그가 마이크를 내려놓았다고 해서, 그의 말까지 멈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진짜 ‘김어준 이후의 김어준’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그는 앞으로 누구로 진화할 것인가. 김어준이란 인물은 단지 한 방송인의 이름이 아니라, 말과 공감, 실험과 도전이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결합되어 사회에 흔적을 남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열린 형태'였다. 이제 그 열린 형태는, 스스로 또 다른 그릇을 찾아가야 한다.
그의 말은 이미 기능을 넘어 문화가 되었고, 그의 화법은 시대의 주름에 발랄하게 선을 그은 붓질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룬 모든 실험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말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지점에서 김어준의 다음 행보는 단지 스튜디오의 확장에 있지 않다. 오히려, 말의 온도와 윤리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 쪽으로 향해야 한다.
그의 언어는 ‘비판의 칼날’이자 ‘위로의 베개’였다. 날을 세우는 동시에 품으려 했던 이중 구조는, 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관심에서 비롯된 충돌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이었다. 앞으로 그는 더 섬세한 감각과 더 깊은 귀로, 말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단순한 대립의 언어가 아닌, 소통과 조율, 다층적 공감의 언어로의 진화를 요구받고 있다.
그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으는 이유는, 그가 완성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어준은 언제나 '과정 중의 인간'이었다. 정답을 선언하지 않고, 끊임없이 되묻고, 실수하고, 다시 걷는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그의 끝보다 그의 다음을 궁금해한다.
그다음은 어쩌면, 말에서 침묵으로, 정보에서 사유로, 혼자 외치는 언어에서 공동체와 나누는 말로의 이행일 수도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자극적 프레임이 아닌, 내면의 울림을 담은 언어, 곧 '깊이의 언어'로의 탈바꿈이다. 그 언어는 더 넓고 더 느리며, 더 성찰적인 방식으로 공동체의 마음에 닿을 것이다.
앞으로의 김어준은 예전처럼 급진적이거나 통쾌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더 묵직하고, 더 너그러우며, 더 따뜻한 사람으로 자리할 수 있다. 그의 말이 이제는 자신을 관통하고, 상처 입은 타인에게도 머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그는 ‘말의 숙성’을 이룬 셈이다.
결국 우리는 김어준이라는 사람을 통해 단지 한 인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시대와 관계 맺고, 어떻게 공감과 분열을 동시에 생산하는지를 목격한다. 김어준은 하나의 해답이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으로 남을 때 더욱 빛난다.
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지금이 시작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더 많은 사람들의 언어로 이어져야 한다. 김어준이라는 '현상'은 이제,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들으며,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를 되묻는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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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김어준을 기다리며
김왕식
어제의 말은 돌멩이처럼 던져졌지만
그 파문은 아직도 강물 위에 번진다
웃음으로 가린 상처가 있었고
농담 속에 숨은 진실이 있었다
그는 질문의 화살을 들고
어둠을 꿰뚫는 사냥꾼이었다
그러나 내일의 김어준은
칼날보다 빛을 닮아야 한다
갈라진 마음을 꿰매는 실이 되어
분노 대신 온기를 지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 줄 다리가 되어
함께 사는 세상의 숨결을 불러야 한다
말이 다하지 못한 자리에
새로운 말의 숲을 키워야 한다
그 숲에서 우리는
서로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