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조 시인의 「디카시를 짓다가」 ㅡ청람 김왕식

김왕식



□ 김유조 시인의 시가 실린 <한국현대시>



* 디카시를 짓다가



시인 김 유 조



무언극의 찰나를 다섯 줄로 포승하려는
언어의 밧줄 탱탱하다
한 컷 현장이 해설적 포박은 거부인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의 고비를
다섯 시행으로 득음하려다
놓치고 말미암아...

끝내 여섯 행보를 저지르고야 만다



* 디카시ㅡ 디지털 사진과 함께 하는 5행 시, 우리나라가 시초







디카시의 언어 혁명, 그 경계 위의 실험정신
— 김유조 시인의 「디카시를 짓다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유조 시인의 「디카시를 짓다가」는 사진과 언어의 경계에서 창작자가 겪는 내면의 갈등과 미학적 실험을 그 자체로 형상화한 메타디카시이다. 그는 디카시 창작의 본질적 한계와 도전, 그리고 창작자로서의 불가피한 일탈까지를 자기 고백적 어조로 풀어내며, 이 짧은 일곱 행을 통해 디카시 장르의 존재론적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 선다.

첫 행의 “무언극의 찰나를 다섯 줄로 포승 하려는”은 디카시라는 장르의 특성과 시인의 창작 의도를 동시에 담고 있다. ‘무언극’은 사진이 지닌 침묵의 언어를 암시하며, 그 찰나를 ‘포승 하려는’ 시도는 언어로 포획하려는 시인의 열망이다.
이는 포승줄이라는 억압적 이미지로 제시되며, 창작의 욕망 자체가 이미 긴장과 저항의 선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언어의 밧줄 탱탱하다”는 표현은, 시를 구성하는 언어가 사진이라는 시각적 진실 앞에서 얼마나 날카로운 긴장 상태에 놓이는지를 상징한다.
여기서 밧줄은 단지 형식이 아니라, 시인의 자율성과 표현 욕구를 구속하는 장치로 변모한다. 그 탱탱한 긴장 위에서 시인은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는 존재다.

세 번째 행은 디카시가 갖는 근원적 한계를 다시 되짚는다. “한 컷 현장이 해설적 포박은 거부인데”라는 구절은 사진이라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 자족적이며, 해설이나 해명 없이도 온전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임을 말해준다. 이와 달리 언어는 자꾸 의미를 덧붙이고, 맥락을 보충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시인은 그 둘 사이에서 계속 흔들리며, 언어의 설명적 속성과 시각의 함축적 속성이 충돌하는 지점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경계의 고비를 / 다섯 시행으로 득음하려다”는 구절은 디카시의 핵심을 꿰뚫는다. 보이는 것(사진)과 보이지 않는 것(언어 너머의 진실)을 오직 다섯 줄로 조율해 내려는 시인의 고투, 그 득음(得音)은 단순한 완성의 문제가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향한 시도의 기록이다.
결과는 ‘놓치고 말미암아’라는 담담한 자기반성으로 이어진다. 이는 패배가 아니라, 장르적 실험의 불가피한 오류를 수용하려는 창작자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지막 행 “끝내 여섯 행보를 저지르고야 만다”는 그야말로 통렬한 자기 고백이다. 디카시는 다섯 줄이라는 형식의 규율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만, 김유조 시인은 그 규범을 넘고 마는 창작적 충동을 막지 못한다.
이는 형식의 엄격함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형식을 깨뜨리는 예술가의 본능을 용납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형식을 존중하되, 진실한 예술은 언제나 틈에서 피어난다는 김 시인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김유조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디카시라는 장르의 태동과 갈등, 그리고 그 미적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제시한다. “다섯 줄의 예술”이라 불리는 디카시의 정신은 정형과 즉흥 사이, 시각과 언어 사이의 숨 막히는 경계를 넘나들며 탄생한다.
이 시는 단지 한 편의 자전적 작품이 아니라, 디카시 창작 그 자체의 미학적 선언이라 할 만하다.

그의 시는 끝내 규율을 넘지만, 그 넘침 속에서 새로운 울림을 길어 올린다. 김유조의 시는 사진을 통해 삶을 읽고, 언어를 통해 침묵을 해석하며, 결국에는 모든 예술이 도달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감각의 현장,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을 향해 나아간다. 이는 곧 그가 지향하는 문학의 본질이자, 디카시가 향후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명료한 이정표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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