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이혜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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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ㅡ 우리 하나 되어
*시인 이혜선
은보라색 밝아오는 하늘
그 아래 강물 한 자락
먼 길 떠날 때
나 그대와 더불어 길 떠나려 하네
가다가 여울엔 굽이쳐 흐르고
가다가
지푸라기 흙탕물 모두 섞여서
우리 모두 한 몸 되어 흘러가려 하네
얕은 개울엔 송사리 떼 기르고
물살 맑은 강물엔 연어 떼 길러서
흘러가겠네 마침내 바다가 되겠네
우리 하나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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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선(李惠仙) 시인(1950~ )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세종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1981년 《시문학》 추천
1950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혜선(蕙先)이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세종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시문학》에 「돌문」, 「나를 만남」, 「지장보살」, 「갈대밭 머리」가 서정주 등에 의해 추천 완료되어 등단했다. 한국의 전통적 정서와 역사의식, 또 불교정신에 뿌리를 두고 역사와 공간의 상호작용을 표현하는 시를 주로 썼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인간의 보편적 감정과 이성 속에 내재한 인간존재의 본질과 영원성을 추구하면서 그 빛을 밝히려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전통적 서정과 생명의식을 모태로 한 시를 통해 여성성을 표현하기도 했다. 시인 스스로는 역사의식과 전통정신뿐만 아니라, 생활과 사랑, 이별과, 실존, 천지자연과의 교감세계까지도 다루는 시까지를 아우르고자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명성여고 교사로 재직했으며, 대림공업전문대학 강사, 세종대, 신구대, 대림대 강사로도 일했다. 한국시문학문인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국제팬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학비평가협회 부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를 역임했고, <남북시>, <진단 시>, <시인의 집>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으로는 『신 한 마리』(호롱불, 1987),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천산, 1996), 『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월간문학출판부, 2005)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 『문학과 꿈의 변용』(푸른 사상, 2012)을 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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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우리 하나 되어>
― 전통과 생명의 강을 따라 흐르는, 이혜선 문학의 본류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혜선 시인은 한국 여성문학의 중추적 존재로, 문단 중심에서 시대의 맥을 짚으며 반세기에 걸쳐 굳건히 시단을 지켜온 원로 문인이다.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와 세종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1981년 《시문학》에 서정주의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오롯이 시의 길을 걸으며 한국적 정서와 불교적 사유, 여성적 생명성과 역사적 자각을 한 몸에 지닌 시편들을 선보여 왔다.
이혜선 시인의 시 <서시-우리 하나 되어>는 그의 작품세계가 지향하는 핵심 가치들이 농밀濃密하게 응축된 서정적 개화다. 제목의 ‘서시’는 시인의 출발점이자 다짐이고, ‘우리 하나 되어’는 그의 시가 향하는 공동체적 궁극지이다.
시의 첫 연은 ‘은보라색 밝아오는 하늘’이라는 색채감 있는 이미지로 시작된다. ‘은보라’는 단순한 새벽빛이 아니다.
이는 분리와 대립을 넘어서는 색채의 은유이며, 낮과 밤, 시작과 끝,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불이不二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아래 흐르는 ‘강물 한 자락’은 시인의 시선이 닿는 삶의 자리이며, ‘그대와 더불어 길 떠나려 하네’라는 구절은 시인이 자기 존재를 타자 속에 포섭하고자 하는 연대의 고백이다.
따라서 이는 전통의 지층과 미래의 희망이 교차하는 시공간이며, 이혜선 시학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영원성’의 문이다. 그 아래 ‘강물 한 자락’은 곧 ‘존재의 흐름’을 상징하며, 이 길 위에서 시인은 ‘나 그대와 더불어 길 떠나려 하네’라며, 인간 개별성을 넘어선 연대의지를 시적으로 선언한다.
이혜선 시의 가장 큰 특징은 ‘나’와 ‘너’가 따로 흐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여울과 흙탕물, 지푸라기마저 배제하지 않고 모두 끌어안아 ‘한 몸 되어 흘러가려는’ 시인의 시선은, 단순한 서정의 차원을 넘어, 실존의 구별마저 무화시키는 불이의 사유를 구현한다.
여기서 공존이란 단지 함께 있다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라, 다름을 끌어안고 ‘우리’로 다시 태어나는 시적 환원이다.
두 번째 연에서 시인은 ‘굽이쳐 흐르는 여울’, ‘지푸라기 흙탕물’처럼 불완전하고 이질적인 삶의 질료들을 끌어안는다. 이것은 불교적 자비심과 무차별의 정신으로 확장되며, ‘우리 모두 한 몸 되어’ 흐르려는 지향은 곧 분열의 시대에 대한 시인의 윤리적 응답이다. 그가 말하는 ‘우리’는 가족이나 민족을 넘는 존재의 보편성이다.
세 번째 연은 삶의 다양성과 미래지향적 생명관이 교차하는 자리다. ‘얕은 개울엔 송사리 떼’, ‘맑은 강물엔 연어 떼’는 이혜선 시 세계의 전형적 상징이다. 송사리는 일상성과 여성성의 상징이며, 연어는 귀소 본능歸巢本能과 회귀回歸의 신화를 내포한다. 이 두 생명 존재는 그 자체로 작고 보잘것없지만, 하나 되어 ‘바다’가 된다는 결말은 장엄한 존재론적 통합을 암시한다.
이혜선의 작품은 늘 ‘시간의 강’ 위에 있다. 그 강은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고, 현실과 꿈,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너와 나를 아우른다. 그의 시는 결코 파격적이지 않지만, 깊은 내면성과 전통의 맥을 잇는 정중동의 미학으로 독자에게 조용한 전율을 남긴다. 특히 그는 한국 전통정서와 불교적 무상관, 그리고 여인으로서 감내해 온 현실을 ‘고요한 목소리’로 읊되, 그 안엔 서사적 강단과 영혼의 통찰이 번뜩인다.
또한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라는 시집 제목처럼, 그는 시를 통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묻고, 그것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며, 결국 인간과 우주, 시와 생명이 하나로 수렴되는 지점을 추구한다.
<서시-우리 하나 되어>는 단지 한 편의 시작詩作이 아니라, 이혜선이라는 거대한 시인의 강물이 시작되는 샘이다. 그녀의 시편들은 흙탕과 수정이 공존하는 강처럼, 때론 맑고 때론 탁하며, 그렇게 흘러서 결국 독자와 하나 되어 바다가 된다. 이는 곧, 시인의 문학관이자 삶의 철학이며, 문단이 그녀를 오랜 시간 중심에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여
이혜선 시인의 시는 언제나 ‘우리’를 향한다. 여성성과 전통, 역사와 사랑, 불교와 자연의 교감을 모태로 삼아, 한 줄의 시가 한 그루 나무가 되고, 그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하나 되어’ 흐르듯 그렇게 우리에게 닿는다. 이는 시인의 문학적 생명력이 세속의 시간과는 다른 이유이다. 그녀의 시는 그 자체로 강이고, 기도이며, 곧 ‘마침내 바다가 되겠네’라 노래하는 생명찬가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