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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주름, 기억의 옷걸이ㅡ 청람 김왕식

김왕식






바람의 주름, 기억의 옷걸이



청람 김왕식




옷장 앞, 무수한 어깨들이 빛을 등지고 서 있다. 셔츠, 외투, 니트, 무늬가 흐릿해지고 단추는 빠졌다. 단정히 걸린 몸은 모두 시간의 껍질. 삶의 여백이었던 천 조각들이 구김진 채 숨을 고른다.

한 벌은 계절 하나. 트렌치코트에 남은 눈물 자국, 면셔츠에 스민 바람의 체온, 재킷 속에 갇힌 낙엽의 속삭임, 패딩에 묻은 침묵의 무게. 옷은 살갗 너머 감정을 품은 가장 가까운 기억. 옷장 속은 시간의 무덤이자 기억의 보관소.

사이즈는 맞지만 마음엔 걸리지 않는 형태들. 천은 그대로지만, 그때의 감정은 맞춰지지 않는다. 어깨를 휘감았던 감촉은 이제 낯설다. 곰팡이 향에 묻힌 옷들을 걷어내자, 오래 접혀 있던 내면이 드러난다. 낡은 셔츠보다 더 낡은 자의식 하나. 수선이 불가능한 오래된 마음.

외투보다 가벼운 나뭇잎 하나, 계절이 새로 짠 결의. 무늬는 없지만 결이 있다. 햇살이 그 위를 따라 손을 얹는다. 다림질 대신 바람이 주름을 펴고, 천이 아닌 숨이 몸을 감싼다. 천은 벗겨지되, 기온은 피부에 붙는다. 걸치는 건 옷이 아니라 계절의 결.

발끝엔 진달래 꽃술, 손끝엔 민들레의 떨림. 의복의 기능은 멈췄지만 감각은 더 명료해진다. 비닐 속에 갇혀 있던 기억들은 투명했으나 숨이 막혔다. 세탁된 냄새보다 이끼 냄새가 오래 남는다. 향기와 냄새 사이에 숨은 감정이 진실을 품는다.

작은 숲, 잎 하나 바람에 머문다. 떨어질 수 있었지만 스스로 멈춘 존재. 옷을 벗기 가장 적절한 자리. 허리에 바람을 두르고, 팔엔 빛을 감고, 발등에 새소리를 얹는다. 공기 한 줌, 구름 한 조각이면 충분한 덮개. 짓지 않아도 입을 수 있는 형태.

옷은 가렸지만 결코 설명하진 못했다. 기억은 천보다 더 얇고, 감정은 천보다 더 무겁다. 외투 대신 나무가 되고 싶은 갈망. 잎 하나로 계절과 호흡할 수 있는 존재. 무늬 대신 결을 지닌 몸.

다림질 대신 숨을 들이켠 하루. 옷걸이엔 계절 대신 바람이 걸린다. 이름 없는 옷, 재단 없는 몸. 바람에 오래 남는 것은 옷이 아니라 무늬 없는 나. 입지 않아도 감싸는 것, 감싸지 않아도 살아지는 것.
그것이 존재의 옷.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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