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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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순간
시인 주광일
문득
나 떠날 순간이 닥쳐와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무것도 아쉬워하지 않으리.
달 없는 밤 이름 없는 별 하나 흘러 흘러 우주너머로 사라져 가듯, 아랫마을에서 윗마을로 마실가듯, 말없이 떠나가리.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성모님께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실 것을 간구하며, 최후의 숨을 거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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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광일 시인의 시 『나 떠날 순간』
ㅡ삶의 마지막까지 ‘의연한 절차탁마’를 노래한 고결한 시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주광일 시인의 시 「나 떠날 순간」은 죽음을 노래한 시가 아니다.
외려 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자만이 쓸 수 있는 절대 고요의 시이자, 평생을 법과 시, 신앙과 삶 사이에서 꿋꿋이 살아온 한 인간의 온전한 귀의(歸依) 선언이다. 단정하고 비장한 말투 안에 흐르는 초월의 의식은, 삶을 완전히 정리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도 맑은 결심에서 비롯된다.
“문득 나 떠날 순간이 닥쳐와도”라는 첫 구절은 마치 유언처럼 조용히 시작된다.
시인의 목소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 구절은 죽음이 예정된 사건이 아니라, 어느 날 문득 맞이하는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을 전한다. ‘죽음의 예고 없음’을 두려움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마저 평정심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시인의 철학적 성숙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무것도 아쉬워하지 않으리.” 이 문장은 반복 속에서 더욱 단호해진다. 인생의 끝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그 무엇에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는 결단은 평생을 법조인으로 살아오며 매 순간 정의의 저울 위에서 치열하게 자신을 다스려온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는 단지 개인의 심경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향한 정직하고도 깊은 성찰이 낳은 절제의 언어다.
이어지는 구절 “달 없는 밤 이름 없는 별 하나 흘러 흘러 우주너머로 사라져가듯”은 장엄한 자연의 순환 속으로 자신을 기꺼이 귀속시키는 고요한 죽음의 비유다. ‘이름 없는 별’이라는 표현 속엔 개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린 겸허가 깃들어 있다. 이는 곧 자신의 생을 어떤 영웅담으로도 치장하지 않고, 겸허한 우주의 한 입자로 돌아가고자 하는 태도이다.
“아랫마을에서 윗마을로 마실 가듯, 말없이 떠나가리.” 이 구절은 죽음을 일상적인 이동으로 바라본다.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의 이주는, 엄숙하거나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다만 존재의 수위(水位)가 옮겨가는 일일 뿐이다. 법조인으로서 냉철한 현실 감각을 지녔던 시인이, 시인으로서는 얼마나 자연과 순리의 감각에 기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오직 성모님께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실 것을 간구하며, 최후의 숨을 거두리.”는 전 생애를 관통하는 신앙의 완결이다. 삶과 죽음의 모든 여정은 스스로 감당하지만, 끝내 신의 자비를 구하는 이 간구는 오만하지 않고 진실하다. 이는 법과 인간, 삶과 시를 통달한 한 영혼이 마지막으로 내미는 기도의 손길이며, 자신의 무력함마저도 받아들이는 깊은 영성의 고백이다.
이 시의 문체는 소박하지만, 함의는 장엄하다. 시인은 결코 과장하거나 울먹이지 않는다. 오히려 숨소리조차 낮추며, 자신이 겪게 될 마지막 장면을 ‘존엄한 침묵’으로 연출해 낸다. 시적 기법보다는 정신의 기품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주광일 시인은 평생을 법의 길을 걸으면서도 시인의 영혼을 지닌 이였다. 불의 앞에 단호했고, 진실 앞에 온유했으며, 신앙 앞에 겸손했던 그는 ‘삶과 죽음의 일치’를 시로써 이룬 진정한 사유자였다.
『나 떠날 순간』은 단지 한 편의 아름다운 유고시가 아니다. 그것은 남겨진 이들에게 주는 마지막 인사이자, 이 땅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명징한 해답이자 지침서이다. 고결한 생은 고요히 떠난다. 그러나 그 고요는 영원히 메아리친다. 이 시는 바로 그 영원의 메아리다.
ㅡ청람 김왕식
□ 주광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