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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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시계탑
글|청람 김왕식
강원도 철원.
기차가 멈추지 않는 오래된 역.
그 역 광장엔 1954년에 세워진
고풍스러운 시계탑이 서 있다.
오전 11시 08분.
바늘은 수십 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시계탑 앞에는
작은 벤치가 있고,
매일 정오 즈음,
누군가가 그 앞에 앉아
하늘을 본다.
이 사람의 이름은 정선우, 72세.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지만
그는 매일 똑같이,
멈춘 시계탑 아래서
무언가를 기다린다.
여름방학을 맞아
이 지역에 봉사활동을 온
대학생 유하은, 23세.
지역 아동센터에서 일하다
우연히 시계탑 앞 노인을 발견한다.
“저 시계… 고장 난 거죠?”
센터 원장은 조용히 말한다.
“정확히는…
누군가의 시간이 멈춘 거예요.
그 할아버지는
40년 전 그 시간에
약속이 있었대요.”
“누구랑요?”
“딸이요.”
40년 전,
선우는 약속을 어겼다.
딸 정유림, 10세.
학교 끝나고 시계탑 앞에서
함께 서울행 기차를 타기로 했지만
그는 출장을 핑계로
그날을 놓쳤다.
그 이후,
딸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날 시계탑은 번개를 맞아 멈췄다.
선우는
그 순간 이후, 자신의 시간도
같이 멈추었다고 믿는다.
“누구는 다 잊고 산다지만,
나는 그 아이가
아직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어느 날,
하은은 선우에게
살며시 묻는다.
“시계가 다시 움직이면…
그 시간도 흘러갈까요?”
선우는 대답하지 않는다.
며칠 뒤,
하은은 근처 폐공장에서
녹슨 시계 부품들을 찾아온다.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오래된 시계탑을 정비해 본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오랜만에 시계탑 바늘이
‘틱—’
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11시 09분.
선우는 그 순간
말없이 고개를 든다.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그 이후,
시계탑은 하루 한 번씩
1분씩만 움직인다.
다음 날엔 11시 10분,
그다음엔 11시 11분.
마을 사람들은
그 시계탑을 ‘기억의 시계’라 부른다.
하은은
자신의 노트를 펴고
이렇게 적는다.
“어떤 시간은 흘러야 끝나고,
어떤 기억은 멈춰야 비로소 시작된다.”
선우는 여전히
매일 시계탑 앞 벤치에 앉는다.
이제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시간을
조금씩 되찾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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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식 작가의 '시간이 멈춘 시계탑'을 읽고
문학평론가 김기량
《시간이 멈춘 시계탑》은 단편소설의 구조적 정수를 손바닥 크기의 짧은 분량 안에 오롯이 담아낸 고밀도 서사다. 작가 청람 김왕식은 이 작품을 통해 ‘멈춤’과 ‘흐름’, ‘기억’과 ‘회복’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단단하게 맞물리게 하며, 인간 존재의 내면 깊은 층위를 섬세하게 응시한다.
서사의 무대는 강원도 철원. 기차가 더는 서지 않는 낡은 역, 그리고 멈춘 시계탑. 이 공간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상실과 속죄의 상징적 무대다. 11시 08분에서 멈춘 시계탑은 시간을 잃어버린 인간의 마음을 형상화한다. 작가는 이 시계탑을 통해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갇힌 존재’와 ‘그 과거를 끝내 응시하는 용기’를 동시에 드러낸다. 노인 선우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그 자리에 머무르지만, 그의 ‘기다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기다림 속엔 통절한 회한, 부채의식, 그리고 삶의 잔향이 고요히 스며 있다.
작품의 갈등은 발단과 전개를 지나 하은이라는 인물을 통해 위기로 진입한다. 23세 대학생 하은은 선우의 정지된 세계를 응시하는 외부의 시선이다. 그녀는 질문한다. “시계가 다시 움직이면 그 시간도 흘러갈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상처의 치유가 가능한가’라는 본질적 물음을 포함한다. 선우의 무언의 반응은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단 한 문장 없이도 강하게 전달한다. 여기서 김왕식 작가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진실을 담을 수 있음을 다시금 증명해 낸다.
절정은 시계탑의 움직임이다. 11시 09분, 단 1분의 움직임은 거대한 감정의 해방이며, 세월을 건너는 상징적 재시작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시계가 하루에 1분씩만 흐른다고 말한다. 단번에 회복되지 않는 기억, 점진적으로 되찾아야 하는 인간의 시간. 이 절제된 장치는 김왕식 문학의 미학인 ‘느림과 사유’의 철학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동시대가 추구하는 빠름과 망각에 대한 묵직한 반론이다.
결말부의 하은의 메모, “어떤 시간은 흘러야 끝나고, 어떤 기억은 멈춰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요약하는 명문장이다. 이 말은 기억의 슬픔을 방치하지 않고, 그렇다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 자리에 오래 머무는 용기를 말한다.
김왕식 작가의 문학은 단지 이야기의 완결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끝을 미루고 여운을 남기는 법을 안다. 열린 결말이란 독자의 사유를 허용하는 문학적 공간이다. 그 끝을 향해 독자가 자기 시간을 들고 천천히 다가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김왕식 소설의 실험적 구조이자 진화하는 정체성이다.
결국 《시간이 멈춘 시계탑》은 상처를 가진 모두의 이야기이며, 멈춰버린 내면의 시계에 다시 바늘을 얹는 치유의 의식이다. 삶이란 고장 난 시계처럼 한순간 멈추기도 하고, 아주 느리게 다시 흐르기도 한다. 김왕식 작가는 이 보잘것없는 1분의 움직임에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담는다. 그는 말한다. 고장난 것은 시계가 아니라 기억이며, 진짜 움직여야 할 것은 우리 마음의 시간이다. 이 작품은 그 조용한 울림을,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가장 아름답게 실현한 예다.
ㅡ 문학평론가 김기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