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냉면집에 들어온 로봇
□ 청람의 辯
종로 피맛골은 내가 세월을 보관한 창고다.
허름한 냉면집 의자에 앉아 수십 년을 지나온 얼굴들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고층 빌딩 그림자 아래,
뜨거운 추억 하나가 숨을 쉰다.
나는 그 골목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닳아버린 구두와 찢어진 수첩,
혼잣말처럼 튀어나오는 욕설 속에도
한 시대의 품격과 희망이 녹아 있었다.
이제 그 사람들을 소설로 불러낸다.
21세기 로봇이 냉면을 먹는 시대에도
사람 사는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그 웃음과 눈물을
다시 피맛골로 불러내고 싶었다.
이 책은 골목의 향기를 잊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바친다.
그리고 그 골목에 아직도 하루를 살고 있는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바친다.
2025년 종로 어느 찻집에서
김왕식
■ 프롤로그
피맛골은 지워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 종로 2가를 지나며 “여기 피맛골이었지?”라고 말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젠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냉면 육수처럼 깊고
막걸리 잔처럼 휘청였던 그 골목의 숨결은
초고층 유리 빌딩 사이를 피해 아직도 흐른다.
60년대 이발소, 70년대 만화방, 80년대 택시 기사들의 쌈짓골,
90년대 직장인의 점심,
2020년대엔 이제 로봇도 방문하는 공간.
사라진 듯 살아 있는 피맛골.
이곳에, ‘사람’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된다.
■ 목차
1부. 냉면집에서 미래를 말하다
1편. 냉면집에 들어온 로봇
2편. 연탄불 켜는 날, 와이파이가 끊겼다
3편. 그 많던 장발들이 어디로 갔을까
4편. 달력 없는 이발소
5편. 막걸리잔 속의 인공지능
2부. 골목을 잃은 사람들
6편. 피맛골 마지막 종소리
7편. 마포에서 온 노점상
8편. 간판을 지킨 사람
9편. 뒷골목 반찬가게의 암호
10편. 안경 너머의 추억
3부. 세대가 충돌하는 날
11편. 386의 중년일기
12편. MZ가 차린 국숫집
13편. 꼰대와 갓생의 술자리
14편. 유튜브에 올라간 장례식
15편. 손 편지 vs. 채팅창
4부. 사랑도 골목에서 피어난다
16편. 종로극장의 마지막 러브레터
17편.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그녀
18편. 노인정 앞 고백사건
19편. 말 못 한 청혼
20편. 카세트테이프를 돌리던 날
5부. 피맛골의 마스코트들
21편. 만복이와 로봇개
22편. 연탄재를 들고 다니는 여자
23편. 길고양이의 이름
24편. 돌아온 삐삐아저씨
25편. 미싱기계가 만든 교향곡
6부. 잊힌 사람들을 위한 묵시록
26편. 지하 다방의 유령
27편. 고무신을 놓고 간 아이
28편. 족발집 영수증
29편. 오래된 경로당에서 온 편지
30편. 꿈을 잃은 사진관
7부. 도시의 기억을 걷는 사람들
31편. 폐점 앞에서 찍은 셀카
32편. 무채색 점퍼를 입은 남자
33편. GPS 없는 배달부
34편. 지하철 노선보다 오래된 발자국
35편. 전자시계와 회중시계
8부. 추억을 파는 시장
36편. 종로 오일장
37편. 노점상 할머니의 QR코드
38편. 구멍가게에서 탄생한 주식회사
39편. 청춘을 팔고 남은 것
40편. 시장 통로에 놓인 시집 한 권
9부. 다시, 사람
41편. 기억을 주는 사람
42편. 하루를 나눠 쓰는 사람
43편. 말을 걸지 않아도 아는 사람
44편. 아무 말 없이 곁에 앉는 사람
45편. 이름이 아니라 얼굴로 남은 사람
10부. 마지막 골목, 마지막 이야기
46편. 눈 내린 피맛골
47편. 폐업한 가게의 문
48편. 수건에 새긴 이름
49편. 피맛골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
50편. 그래도, 우리는 여기 있다
■
청람의 피맛골 사람들
제1편
냉면집에 들어온 로봇
종로 2가,
종로타워 그림자가 칼처럼 뻗은 바닥 아래
한 뼘짜리 *고샅이 누워 있었다.
길이라기보단 시간의 갈비뼈처럼 휘어진 통로였다.
그 안쪽,
간판의 붓글씨가 비스듬히 기울고
주황색 등불이 낮에도 켜진 ‘우래옥 피맛면옥’.
문풍지 찢어진 창 너머로
국물 냄새와 먼지, 연탄의 언어가 비집고 나왔다.
이만수 (82)
그는 오늘도 새벽 자박자박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와 육수를 고았다.
정수기 물은 못 쓴다.
가게 냉면은 혀로가 아니라 기억으로 먹는 음식이니까.
그가 말하는 ‘기억의 국물’이란
아들 군대 보내고 돌아오지 못한 날부터 매일
벽에 건 영정 사진 앞에 한 그릇 놓으며
눈물 대신 육수를 붓던 손맛이었다.
한때, 그 육수에 신문기자도, 대통령도 감동했었다.
하지만 요즘 손님은 육수보다 와이파이를 먼저 찾는다.
그날, 11시 07분.
가게 문이 툭 열렸다.
딸깍, 딸깍—
스니커즈도 구두도 아닌,
쇳조각이 눌러 찍는 듯한 걸음소리.
“안녕하십니까.
냉면 곱빼기 두 그릇, 육수 리필 포함입니다.”
목소리는 기계였지만
말투는 정중했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눈앞에 선 건
최신형 배달보조 AI, '라비-R3'.
윤기 흐르는 유광 바디,
렌즈로 된 눈, 팔 없는 두 발 보행형.
가게 손님들 젓가락이 멈췄다.
최봉수(55)는 냉면발을 물고 있다 뿜었다.
“세상에… 로봇이 냉면을 쳐묵네?”
이만수는 육수 국자를 든 채 얼어붙었다.
그러고는 툭 내뱉었다.
“다 된 국물에 기계가 숟가락 얹었군.”
한쪽 테이블에서
검정 니트를 입은 젊은 여자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김진희(27),
푸드센트릭이라는 스타트업 개발자.
피맛골 입구 공유오피스에서 일하며
이 골목을 ‘세대공존 테스트베드’라 부른다.
“사장님, 이 친구는 음식 감정 AI예요.
맛뿐 아니라 온도, 분위기, 향기, 정서 반응까지 분석하죠.”
“정서 분석? 허허, 정서라는 게 그렇게 찍어낼 수 있는 거면
내 사는 인생, 공장에서 찍었지!”
라비는 냉면을 바라보더니
돌연 말없이 멈췄다.
빛나던 렌즈가 깜빡이더니
낯선 음성을 출력했다.
“형, 우리 다음 주에도 냉면 먹으러 또 오자.”
가게 안,
공기마저 얼어붙었다.
그건 분명…
이만수의 아들이 생전에 했던 말이었다.
이만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젓가락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어떻게… 그걸…”
김진희는 숨을 삼켰다.
“라비는 도시 생활기록 음성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억과 장소 연관성을 매칭합니다.
혹시, 이 공간에서 과거 손님의 음성이…”
“이 자리가…
우리 아들이 마지막으로 앉았던 자리였어.”
이만수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날 이후,
라비는 피맛면옥 구석에 조용히 놓였다.
전원은 꺼졌지만 누구도 치우지 않았다.
손님들은 이제 냉면보다
'기억을 가진 로봇'을 보러 왔다.
그 골목에서,
사람도 기계도 눈시울을 적셨다.
최봉수는 국물을 들이켜며 말했다.
“요즘은 다 *TMI라지만,
가끔은 이렇게 침묵이 더 뼈 때리지.”
이만수는 말했다.
“국물이란 게,
혀보다 마음을 먼저 데우는 거지.
{“기억은 휘발돼도, 국물은 남는다.
그리고 그 국물이, 사람을 부른다.”}
ㅡ
* 고샅 ㅡ 좁은 골목
* tmi 란 'too much information'의 영어 줄임
말로 누군가가 불필요하게 많은 정보를 공유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빠르게 확산되
었고 특히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