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제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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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의 피맛골 사람들
제4편
달력 없는 이발소
종로 2가 피맛골 골목 한켠,
세상이 바뀌어도
광고 전단 한 장 붙지 않는 가게가 있다.
간판도 없고,
출입문엔 종이테이프처럼 얇은 빛살이 비껴 있다.
그곳은 이발소였다.
달력도, 시계도, 음악도 없고
오직 가위질 소리만이 시간을 재는 공간.
주인은 조석만(74).
사람들은 그를 ‘조이발’이라 부른다.
조이발은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손님이 앉으면
묻지 않고 자르고
묻지 않아도 다 알아듣는다.
이발 대신 ‘정적’을 깎아내는 남자였다.
그는 벽에 달린 달력을
스스로 찢어낸 지 오래였다.
그에게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기억의 날’로만 작동했다.
그중, 매달 5일.
그날만 되면
이발소는 한 시간 늦게 문을 연다.
누군가 꼭 찾아온다.
오전 10시 27분.
문이 열렸다.
검정 외투, 검정 구두,
그리고 손엔 흰 봉투를 든 남자.
늘 그랬듯 아무 말 없이
두 번째 의자에 앉았다.
조이발은 말없이 머리를 깎았다.
정확히 21분.
그 시간 동안 남자는 단 한 번도 거울을 보지 않았다.
머리를 다 자르고 나면
남자는 봉투를 꺼내 카운터에 두고
고개 한 번 까딱하지 않고 사라졌다.
늘
조이발은 그 봉투를 열지 않고
작은 서랍에 넣었다.
이 패턴은 20년째 반복됐다.
사람들은 그날을
‘검은 손님의 날’이라 불렀다.
그날 오후,
태풍 예보가 있던 바람 센 오후였다.
조이발은
서랍을 열다
무심코 그 봉투를 바라보다
처음으로 손에 올렸다.
‘절대 열지 마시오’
손글씨가 아닌
인쇄된 글자였다.
그날,
조이발은 봉투를 열었다.
안을 보고
가위처럼 접힌 채
의자에 앉았다.
그 속엔
사진 한 장과 메모가 들어 있었다.
“2003년 5월 5일.
당신이 나를 잘라냈을 때
나는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사진 속엔
눈에 붕대를 감은 소년이 있었다.
붕대 위로 이발소 가운이 흘러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받은 조이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억나십니까.
그날, 저는 아버지와 머리를 자르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당신 이발소 앞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당신은…
머리를 자르느라
그 소리를 듣지 못했죠.”
조이발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가, 당신이었군요.”
“20년 동안,
당신이 내 머리를 자를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묻었습니다.”
통화는 끊겼다.
조이발은 가위를 내려놓고
서랍에서 달력 한 장을 꺼냈다.
붉은 펜으로
처음으로 날짜 하나를 동그라미 쳤다.
{“날짜는 지나도 기억은 남는다.
때로 달력을 찢어야
제대로 하루를 다시 붙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