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제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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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의 피맛골 사람들
제5편
막걸리잔 속의 인공지능
피맛골에도 막걸리 향이 흐르는
‘삼해주방’이라는 오래된 주막이 있다.
벽엔 선술집 자랑삼아 걸어둔 유명인 사인 대신
“뒷얘기는 소리 낮춰”
“감정은 잔에만 넘치게”
손글씨가 휘갈긴 종이들이 붙어 있었다.
주인 심난복(70)은
매일 아침 술항아리 뚜껑을 열고
막걸리 냄새로 날씨를 가늠했다.
그날 오후,
잔잔하던 주막에 낯선 말투가 스며들었다.
“안녕하십니까.
막걸리 1인분, 도토리묵 곁들임,
대화 데이터 수집 동의 부탁드립니다.”
강인호(31).
AI 음성 감정인식 시스템 개발자.
요즘은 막걸리 주점에서 ‘감성 대화 데이터’를 모아
AI에 탑재시키는 실험을 진행 중이었다.
“자네, 그 감정이란 걸 술 없이도 모아지나?”
주인장 난복은 찻주전자만 한 막걸리 잔을 내밀며 물었다.
취기가 오를 무렵,
인호는 자리에 놓아둔
USB형 ‘감정데이터 칩’을 실수로 술독 옆에 떨어뜨렸다.
순간, 난복의 막내딸심가온(31)이
항아리 뚜껑을 열다 뭔가를 건져 올렸다.
“이거… 술찌꺼기 아니죠? 뭔데 이렇게 반짝거려요?”
“아, 죄송합니다. 그거 제 겁니다. 절대, 열지 마세요.”
가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거, 열지 말란 말이 제일 궁금한 거죠.”
인호는 손을 뻗었지만
가온은 어느새 USB를 꽂아
노트북을 켜고 있었다.
재생된 음성엔
술자리에 남겨진 수많은 말들이 겹쳐 있었다.
“난 네 뒷모습만 봐도, 기분이 어때 보이는지 알아.”
“이 나이에… 왜 아직도 너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
“딴 데 가서 결혼했다며?
그럼… 왜 매년 이 날, 여기 와?”
가온은 화면을 보다가
한 문장에 손을 멈췄다.
“가온아, 난 너한테 한 번도 말 못 했어.
네가 웃을 때, 내 세상이 환해졌단 걸.”
정적.
막걸리 항아리도 말없이 숨을 죽였다.
“… 이거, 언제 녹음된 거예요?”
인호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작년 이맘때.
그때, 난 여기 앉아서… 그냥, 말해본 거예요.
녹음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가온은 잔을 들었다.
막걸리 위로 떨림이 번졌다.
“그거 알아요?
AI는 수천만 문장을 학습해도
‘숨겨진 고백’은 절대 못 배워요.
왜냐하면, 사람은 그걸…
말하지 않고도 전하니까요.”
인호의 말에 난복은 웃었다.
“그래, 막걸리도 그래.
막걸리 맛은 누룩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나는 거지.”
가온은 USB를 꺼내
천천히 테이블 한가운데 놓았다.
“그날, 나도 말하고 싶었어요.
근데, 막걸리가 내 입보다 먼저 넘쳤죠.”
둘 사이엔
기술도, 시간도, 핑계도 없는 고요한 틈이 생겼다.
그곳에,
말하지 못한 말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감정은 데이터로 남지 않는다.
그건 술처럼,
넘쳤다 사라지고
남은 향으로만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