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허만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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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길 작가의 장편서사시 '아버지의 애국'에 부여된 문학적 위상과 역사적 울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만길 문학박사의 장편서사시 '아버지의 애국'은 그의 시집 <역사 속에 인생 속에>(2023)에 발표한 장편서사시이다.
한 편의 시가 민족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 있는가?
그 물음에 조용하지만 확고한 대답을 들려준다. 이는 단지 한 집안의 연대기적 기록이 아니다. 피로 써 내려간 시대의 울분이며, 그 시대를 넘어 오늘 우리에게 가슴 깊이 되묻는 정신의 메아리다.
문학사적으로 보아 장편서사시는 현대 한국 시단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식이다. 시의 흐름이 짧고 응축된 감정의 파장에 집중되면서, 방대한 서사 구조를 시적으로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허만길 작가는 복합문학의 창시자답게, 시와 서사, 기록과 정서를 입체적으로 직조하여 ‘문학적 구조의 다층성’이라는 고난도의 언어 건축물을 실현시킨다. <아버지의 애국>은 형식과 내용의 한계를 동시에 넘어선, 그야말로 한국 시문학사의 ‘중요 이정표’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립운동가이자 계몽가였던 허찬도 선생의 생애를 통하여 일제강점기의 식민 억압, 농민의 삶, 교육의 희망, 실천적 저항, 그리고 역사적 책임감을 서사로 형상화한다. 열 살 소년이 3·1 운동의 물결에 뛰어들어 아버지가 체포되는 비극적 시초는, 이미 이 시가 단순한 회상이 아닌 ‘상흔의 시학(詩學)’임을 예고한다. 시인은 아버지의 역사를 통해 민족 전체가 겪어야 했던 모멸과 절규를 상징화하며, 서사의 감정선을 내내 팽팽하게 유지시킨다.
특히 허찬도의 삶은 시대와 긴밀히 호흡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민족적 자각의 역사서’라 할 수 있다. 칠곡면에서의 야학 설립은 무지와 억압에 맞선 자발적 계몽의 출발이자, 침묵한 민중에게 빛을 주려 했던 작은 혁명이었다. 당시 사용된 교과서 ‘노동독본’은 단순한 학습 자료가 아닌, 피지배 민중에게 사회의식을 심어주는 창이었다. 야학 교사들의 이름까지 생생히 기록한 시인의 집념은, 문학이 단순한 감성의 산물이 아니라 ‘기억의 윤리’를 실천하는 장르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다.
이후 소방조 활동과 농민 가뭄 해결을 위한 양수기 설치에까지 이어지는 그의 발자취는, ‘저항’과 ‘공공성’이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입증한다. 불의에 저항하면서도 공동체의 삶을 개선하려는 실천은 시의 본질적 사명과도 연결된다. 일본 경찰 구로다에게 맞선 격투, 진주구치소에서의 옥고, 그리고 일본 아사히철공소에서의 동맹파업과 탈출… 이 모든 사건들은 극적 서사를 구성하면서도 결코 허구가 아닌 실화의 무게로 독자를 압도한다.
시인이 아버지의 행적을 다룰 때 가장 탁월했던 점은, 자전적 정서를 억제하고 시대의 맥락 안에서 그를 민족사의 주체로 조명했다는 데 있다. 아버지를 향한 자랑스러운 회고를 넘어, 한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비망록’으로 확장시키는 그의 서사 전략은, 시인의 인간성과 문학성 모두를 증명한다.
허찬도의 행적 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일본 본토에서 무기공장 파업을 이끌고, 결국 7인의 형사에게 쫓기다 탈출하여 끝내 가족까지 일본으로 이주시켜 함께 투쟁을 이어갔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이념가가 아니었다. 목숨을 내놓고 실천하는 행동인이었고, 아내와 자식까지 그 싸움의 길에 동반시킨 책임의 사나이였다. 시는 이처럼 치열하고도 절절한 삶을 문장 너머의 울림으로 담아낸다.
또한 시인은 시 속에서 아버지의 조력자들을 구체적 이름으로 등장시킨다. 매제 하만행, 군의장, 야하타의 조선인친화회 인물들, 오사카의 노동 동지들 등. 이는 역사의 주인공이 ‘위인’만이 아니라 ‘평범한 이름들’이라는 진실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는 곧 문학이 역사와 만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장편서사시가 갖는 또 하나의 미덕은 ‘언어의 중량감’이다. 허만길 시인은 단어 하나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는다. 각 인물과 사건에 부여된 명칭, 장소명, 연대는 모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시적 운율을 해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창안한 복합문학 개념을 통해, 서정과 서사, 현실과 상징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독자적 문체를 확립한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버지의 애국'은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의 역사에 대한 문학적 증언이자, 개인적 유산을 공공의 정신문화 자산으로 전환시킨 탁월한 성취라 할 수 있다. 작품은 독자에게 울림을 남긴다. 단지 감동이 아닌, 책임의 울림이다. 우리는 어떤 정신을 계승해야 하는가? 문학은 어디까지 현실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 시는 그런 질문들을 잊지 않게 한다.
허만길 문학박사는 이미 복합문학 창시자, 정신대 문제 제기자, 환경운동 실천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보존운동의 선구자 등 숱한 면모로 한국 지성사의 궤적을 굵직하게 새긴 인물이다.
그가 쓴 이 장편서사시는 바로 그러한 생애 전체의 집약이자, 그 정점에 놓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의 애국'은 단순히 ‘광복 80주년 특선’이라는 의의를 넘어, 앞으로 한국문학사가 반드시 기념하고 계승해야 할 ‘문학적 귀환의 금자탑’이다. 이 작품은 역사의 바닥에서 피어난 생명의 언어이고, 그 언어는 아직 끝나지 않은 조국의 물음에 오늘도 답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기억’이 아니라 ‘계승’으로 걸어가야 할 시대적 몫을 되새기게 된다. 시문학의 위대한 이정표 앞에 경의를 표한다.
ㅡ청람 김왕식
□ 허만길 시인의 시 '아침강가에서'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