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
미소가 시가 되는 사나이
— 청수 강문규 시인을 곁에 두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인생이라는 긴 문장 속에서, 간혹 쉼표 같은 존재를 만나는 일은 얼마나 복된가. 그 쉼표는 문장을 끊지 않으면서도, 그 문장 전체의 결을 조율한다. 청수 강문규 시인이 그런 사람이다. 바쁜 정치의 언저리에서 오랫동안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살아오며, 그는 현실이라는 딱딱한 질감 위에 늘 온기의 여백을 품었다. 그의 젊음은 국회의 담벼락을 걸으며 꺼지지 않는 이상과 불꽃으로 소진되었지만, 그 뜨거움은 시로 다시 피어났다. 이제 그는 말 대신 시를, 정책 대신 은유를 쓴다. 그리고 그 은유는 사막에 핀 물망초처럼 수줍고도 단단하다.
청수는 이름처럼 맑다.
그 맑음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평면의 투명함이 아니라, 깊이를 알 수 없는 샘물의 맑음이다. 젠틀한 품성에 예의 바른 말씨, 상대를 편안하게 감싸는 유머는 그를 곁에 둔 자에게 한 잔의 따뜻한 차처럼 스미며 머무른다. 그는 말없이 상대의 속도를 맞추되, 결코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상남자’라 불리는 이유다.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단하고, 조용하면서도 분명하다.
며칠 전, 우리는 선술집 한 모서리에 앉아 소주를 기울였다. 뿌연 연기 속에서도 그의 미소는 온기처럼 번졌고, 그 자리는 문득 ‘술자리’가 아니라 ‘시의 자리’가 되었다. 술은 그의 입에서 노래가 되었고, 잔을 부딪치는 소리는 시의 첫 행이 되었다. 어떤 이는 시를 앉아서 쓰고, 어떤 이는 살아가며 쓴다. 강문규 시인은 두 방식 모두를 살아낸다. 하루에 서너 편의 시를 쓰는 열정은 단순한 창작의 양이 아니라, 감각의 밀도에 대한 고백이다.
그의 시는 다정한 풍경처럼 사람의 마음에 천천히 스민다. 삶에 지친 이들이 그의 시를 만날 때, 그들은 자신의 언어로 울지 못했던 감정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시는 위로가 아니라 ‘이해’이다. 그것은 듣고, 가만히 다가앉는 시인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문학은 결국 사람을 닮는다. 강문규 시인의 문학이 따뜻한 이유는, 그 자신이 따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저녁놀 아래 조용히 피어나는 등불 같다. 어둠이 오기 전에 그 등불을 보고 싶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그리고 말없이, 그의 시 한 편 속에 들어가 잠시 앉아 있고 싶다. 청수 강문규 시인은 곁에 있을 때 더 귀한 사람이다. 그의 존재가 문장이 되면 시가 되고, 그 시가 하루를 감싸 안으면, 그날은 잊히지 않는 날이 된다.
나는 다시 그를 보고 싶다.
그의 미소 속에서
또 다른 시 한 편이 태어날 것이다.
□
청수, 미소를 닮은 시 한 편
청람
맑은 물처럼 다가온 이름
청수라는 두 글자 속엔
말없이 흐르는 강 하나 있다
절제된 젠틀함으로
세상의 모서리를 둥글게 감싸며
오래 정치를 품은 자의 눈빛엔
허위와 권모의 먼지를 씻긴
진심의 맑은 무늬가 있다
그는 설계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사람을 설계했다
정치보다 먼저 사람을 품었기에
하루에도 몇 편씩
숨처럼 시를 토해낸다
그것은 쓰는 것이 아니라
심장의 숨결로
살아낸 것을 적는 것이다
한 잔의 소주를 앞에 두고
그는 웃었다
유쾌함이란 말이
그의 눈꼬리에서 시작되었다
상남자라 불러도 좋을
담백한 단단함이
그의 어깨에 편안히 걸려 있었다
시는 그에게 안주가 아니었다
차라리 오래된 약속처럼
그의 가슴에 도착한 미래였다
선술집 구석,
기억 속엔 아직도
그의 미소 한 점이 남아 있다
말없이 분위기를 감싸던 그 웃음
그건 다정한 시였다
품에 안고 싶은 한 편의 시
그를 곁에 둔다는 건
맑은 강물 하나를
마음속에 흐르게 하는 일
오늘도 나는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청수,
그대는
참, 시다.
□ 청수 강문규 시인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