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 허태기 시인의 '강변 산책'ㅡ 청람 김왕식

김왕식



□ 허태기 시인






강변 산책





시인 청강 허태기





입추의 이른 아침
산책하는 반바지
아랫도리가 서늘한데

가을 기운이 은근한
강변 보도의 발걸음들이
분주하다

멈춘 듯 흐르는
맑은 강물 위로 백로가
하얀 꽃 펼치고

풀숲에 흩어진
달맞이꽃이
노란 미소를 보낸다.







청강 허태기 시인의 '강변 산책'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인 청강 허태기의 '강변 산책'은 계절의 문턱에서 느끼는 자연의 숨결을 짧지만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시의 첫머리, ‘입추의 이른 아침’이라는 계절의 시점 설정은 이미 독자를 늦여름과 초가을의 경계로 데려다 놓는다. 이른 아침의 ‘반바지 아랫도리’에 스치는 서늘함은 피부로 감지되는 계절의 전환을 상징하며, 작가가 일상의 작은 감각을 시적 출발점으로 삼는 관찰력을 보여준다. 이 감각적 포착은 계절 변화를 거창하게 묘사하기보다 생활 속 자연의 징후로 드러내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친근함을 지닌다.

이어지는 ‘가을 기운이 은근한 강변 보도의 발걸음들이 분주하다’는 구절에서, 작가는 계절의 움직임을 사람들의 발걸음에 비유한다. ‘분주하다’는 단어는 단순히 산책하는 사람들의 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계절에 부응하는 생명의 내적 리듬을 암시한다.
이는 작가의 시세계가 계절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과 조응하는 동반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멈춘 듯 흐르는 맑은 강물’은 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다. 시각적으로는 정지와 유동이 동시에 존재하는 역설적 장면이지만, 철학적으로는 삶의 흐름과 고요가 공존하는 상태를 상징한다. 허태기 시인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움직이는 고요’의 미학이 이 한 구절에 응축돼 있다. 이는 작가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자연의 형상 속에서 삶의 본질적 태도를 읽어내는 태도를 반영한다.

강물 위로 ‘백로가 하얀 꽃 펼치고’라는 비유는 자연의 존재를 하나의 시적 사건으로 승화시킨다. 백로의 날갯짓을 ‘하얀 꽃’으로 치환함으로써, 작가는 동물과 식물의 경계를 허물고 자연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느끼게 한다.
이는 인간 중심적 시각이 아닌, 존재의 평등성과 연속성을 중시하는 작가의 세계관을 엿보게 한다.

마지막의 ‘풀숲에 흩어진 달맞이꽃이 노란 미소를 보낸다’는 구절은 시의 정조를 부드럽게 마무리한다. 달맞이꽃의 ‘미소’는 의인화된 표현이지만, 억지스러움 없이 자연스럽게 독자의 마음에 잔향을 남긴다. 여기에는 자연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가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는 겸허함이 담겨 있다.

허태기의 시세계는 화려한 수사나 극적인 전개보다, 일상의 순간과 작은 변화를 포착해 그 속에서 삶의 가치와 철학을 길어 올리는 데 힘이 있다. 그는 계절과 인간, 풍경과 마음이 서로 얽혀 있는 접점을 찾고, 그것을 과장 없이 전한다.
이번 작품에서도 자연과 인간의 거리를 좁히며, 독자가 자신의 삶 속 강변을 떠올리게 하는 힘을 보여준다.

다만, 시적 긴장감이나 의외성 면에서는 다소 안전한 길을 택한 인상이 있다. 이미지와 정서가 유려하게 흐르지만,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의 전환이 예측 가능해 독자가 놀랄 만한 발견의 순간은 덜하다. 그러나 이것이 외려 시인 허태기 시의 매력일 수도 있다. 예측 가능성 속에서 오는 안정감, 그 안에서 부드럽게 스며드는 여운이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다.

결국 '강변 산책'은 자연의 세밀한 표정을 읽어내는 시인의 감각과, 그 속에 자신의 삶의 태도를 비추는 절제된 언어가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독자는 이 시를 통해 계절이 전해주는 작고 은근한 변화를 발견하게 되고, 그 변화 속에서 자신의 일상 또한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작가의 철학은 명확하다. 거창한 담론보다, 오늘 아침 강변의 공기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이 시를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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