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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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탑
― 높이의 끝에서 남는 것
폐사터 언덕에 돌탑이 있었다. 층층이 올린 돌이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기단은 기울었고 옥개석 가장자리는 깨졌다. 탑신의 돌들 사이로 억새가 자랐다. 바람이 불자 풀잎이 돌틈을 스쳤다. 소리는 낮았으나 또렷했다.
탑은 위를 향해 쌓은 기도였다. 돌 하나마다 손의 체온이 스며 있었다. 스님은 돌을 씻고 자리를 맞췄다. 장정은 어깨로 무게를 떠밀었다. 여인과 아이는 작은 조각을 모아 바구니에 담았다. 한 마을이 함께 올린 높이였다. 이름이 남지 않아도 손길은 남았다.
높이는 늘 약속을 품는다. 더 잘 보일 것이라는 약속, 더 멀리 닿을 것이라는 약속. 탑이 세워지면 사람은 고개를 든다. 하늘을 본다. 목덜미에 햇빛이 닿는다. 그 순간, 땅은 잊힌다. 발 밑의 돌가루, 어제의 흙비, 손톱 밑의 흙. 탑은 위로만 말하고 아래를 감춘다.
세월이 흐르면 약속은 조용해진다. 비가 모서리를 마모시킨다. 겨울의 얼음이 틈을 벌린다. 봄의 뿌리가 틈으로 파고든다. 탑은 외침으로 쓰였으나 해체는 속삭임으로 진행된다. 붕괴는 사건이 아니라 습관이다.
무너진 탑 앞에 선다. 쌓인 해가 한꺼번에 누운 풍경. 출세의 표식 같던 높이가 돌무더기로 낮아졌다. 돌은 제자리를 잃었으나 근원을 찾았다. 돌은 본디 누워 있던 물질이었다. 탑은 잠시 빌려 쓴 자세였다.
사람의 일도 닮았다. 젊을 때는 높이를 세운다. 직함, 재산, 명성, 박수. 눈길은 늘 위로 간다. 어느 날 기단이 흔들린다. 부모의 병상, 친구의 이별, 아이의 울음. 아래가 무너지면 위는 제 역할을 잃는다. 높이는 기반의 은혜로 선다. 기반이 말라가면 높이는 소리를 낮춘다.
탑을 지키던 나한상 하나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코끝이 부서져 표정이 지워졌다. 표정이 지워지자 기도는 또렷해졌다. 얼굴은 상징의 포장이고, 자세는 의미의 뼈대다. 자세가 무너지면 상징은 흩어진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숨이 보인다.
무너진 탑 주위를 돌았다.
기단 아래 작은 구멍들이 있었다. 쥐와 뱀이 드나든 흔적. 탑은 신성의 기호였으나, 한편으로 비와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였다. 인간이 부여한 의미 위로 자연의 사정이 겹친다. 의미는 겹칠 때 오래간다. 한 줄의 해석으로는 버티지 못한다.
한 노인이 돌을 주워 세웠다. 맞는 면을 찾기 위해 손바닥으로 돌을 굴렸다. 맞지 않는 면은 억지로 눌러도 흔들렸다. 맞는 면은 힘을 덜어도 안착했다. 관계도 이 법을 따른다. 맞지 않는 면은 말이 많고, 맞는 면은 말이 적다. 오래가는 것은 늘 조용하다.
탑의 심주석이 드러나 있었다. 중심의 돌은 크지 않았다. 무게로 세우지 않고 균형으로 세웠다는 뜻이었다. 사람도 중심을 크게 만들려 애쓰다 중심을 잃는다. 중심은 크기가 아니라 위치다. 한가운데 선 것이 중심이다. 무게는 보탬일 뿐 본질은 아니다.
산비탈에서 바람이 바뀌었다.
억새가 반대로 눕고 비둘기 두 마리가 탑 위를 맴돌았다. 한 마리는 내려앉았다. 깨진 옥개석 위로 발가락이 미끄러졌다. 새는 탑을 쉼터로 썼다. 인간의 성업은 새의 휴식으로 끝난다. 충의와 제의로 올린 구조물도 마지막에는 그늘이 된다. 그늘을 남기는 일. 이것이 탑의 마지막 임무일지 모른다.
도시의 탑도 떠오른다.
철과 유리로 쌓은 빌딩. 새벽의 유리창은 별을 닮았고, 밤의 로비는 바다처럼 비췄다. 그 높이에서도 사람은 외로웠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올라갔으나 마음은 따라오지 못했다. 높이가 깊이를 대신하지 못한다. 깊이는 아래로 파는 일에서 나온다. 높이는 위로 올리는 일에서 나온다. 둘이 만날 때 비로소 사람이 산다.
탑은 늘 기점이자 종점이다. 사람을 모으고 흩어지게 한다. 순례자는 탑을 향해 걷고, 장사는 탑을 등지고 흩어진다. 만나게 하는 표식과 떠나게 하는 표식이 한 돌에 겹친다. 방향은 하나가 아니다. 어느 날은 오르고, 어느 날은 내려온다. 같은 계단이 다른 의미를 낳는다.
무너진 탑을 다시 세우자는 말은 쉽다. 손은 모이고, 돌은 쌓인다. 다시 세운 탑은 오래 버티지 못할 수 있다. 성급한 쌓음은 균열을 낳는다. 오래 버티는 구조는 빈틈을 가진다. 바람을 통과시키는 틈, 물을 흘려보내는 경사. 비움이 강도를 만든다. 모든 충만이 균열을 만든다.
해가 기울자 탑 그림자가 옆으로 길어졌다. 그림자는 탑보다 길었다. 높이보다 길이가 더 멀리 갔다. 이름보다 흔적이 더 오래갔다. 사람의 이름이 사라져도 걸음의 흔적은 남는다. 흔적은 기록보다 오래 산다.
돌 하나를 들어 올려 탑 옆에 세워 둔다. 쌓지 않고 세워 둔다. 낮은 기념. 지나가는 이가 또 하나 세울 것이다. 높이의 꿈이 아니라 참여의 증거. 탑은 혼자의 솟음이 아니었다. 여러 손의 무게가 만든 합.
어둠이 내려앉는다.
허물어진 층, 기울어진 각, 억새의 윤곽만 남는다. 바람이 방향을 바꾼다. 돌은 말이 없다. 말이 없을수록 뜻은 깊어진다. 탑은 묻는다. 너는 무엇을 올려 무엇을 잃었느냐. 무엇을 내려 무엇을 얻었느냐. 높이를 향하던 네 목은 지금 어디를 보느냐.
대답은 쉬이 나오지 않는다. 바람은 언덕을 넘어간다. 억새는 또 한 번 눕는다. 무너진 탑 위로 별 하나가 떠오른다. 높이의 끝에서 비로소 위를 본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