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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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지나간 자리
산허리를 스쳐 내려온 바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흔들린 나뭇잎과 기울어진 풀잎만이 방금 전의 일을 증언할 뿐, 바람은 이미 다른 골짜기에서 새로운 이름을 얻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떠난 것을 붙잡으려 하고, 지나간 한마디에 마음을 묶는다. 붙잡힌 것은 곧 굳어지고, 굳어짐은 생기를 잃는다. 바람을 따라 고개를 드는 가지처럼, 삶도 지나감을 통과할 때 비로소 자기 모양을 얻는다.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땅을 탓하기 쉽다. 땅은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 옮겨진 것은 발이고, 흐트러진 것은 마음이다. 알아차림이 닿는 순간 원망은 제 자리를 잃는다.
“무엇을 남기려는 삶은 무겁고, 무엇을 흘려보내는 삶은 가볍다.”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도 하나의 풍경이 된다. 저무는 햇빛이 처마 끝을 비우고 사라질 때, 빈자리는 공허가 아니라 귀의(歸依)의 문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오래 바라본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곳에서, 비어 있음을 배운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지 않기로 할 때, 손바닥에 남는 것은 바람의 온기다. 오늘의 말도, 오늘의 표정도 지나갈 것이다.
그 지나감 속에서 나는 무엇을 놓고 무엇을 살려 둘 것인가 아직 답하지 않겠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