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멈춘 순간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물이 멈춘 순간




물은 흐르면서도 제 모습을 말하지 않는다.

돌을 만나면 모서리를 감싸고, 깊이를 만나면 조용히 가라앉는다. 어느 순간 흐름이 멈추면, 물은 갑자기 하늘을 온전히 품는다. 움직임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구름과 달빛이 잔면에 내려앉는다.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멈추어 서는 한 호흡, 그때 비로소 마음의 바닥이 드러난다. 멈춤은 도피가 아니라 귀환이다. 돌아갈 곳이 내 안에 있었음을 늦게서야 안다. 남들이 먼저 가는 길을 보며 조급해질 때, 물가에 서서 잔잔한 수면을 오래 들여다본다.


“고요는 비어 있음이 아니라, 제 소리를 모두 거둔 충만이다.”


소란은 힘처럼 보이지만, 힘은 소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깊은 강은 떠들지 않고, 넓은 바다는 요란하지 않다. 흐른다는 것은 계속 달리는 일이 아니라, 때에 맞추어 멈출 줄 아는 일이다. 멈춤이 있어야 방향이 생기고, 방향이 있을 때에야 다시 흐를 수 있다. 나는 오늘 해야 할 일들 사이로 스며드는 빈틈을 허락한다. 그 틈이 작을수록 내 마음은 크게 쉰다. 고요를 두려워하던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멈추어 보니, 사라진 것은 과업의 강박이지 나의 생명은 아니었다. 어느 늦은 오후, 바람이 멎자 정원이 갑자기 깊어졌다. 나뭇잎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먼 소리들이 한꺼번에 사라지자, 물이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가만히 되묻는다. 무엇을 더 떠밀어야 하고, 무엇을 이제 놓아야 하는가. 물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흔들림 없이 하늘을 비출 뿐이다. 그 침묵이 내 귀를 밝힌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되, 천천히 걷기로 한다. 속도를 줄인다는 것은 시간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돌려받는 일이다. 오늘의 마지막 빛이 수면에 길게 누울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을 덜어냈음을 깨닫는다.

흘러갈 것은 흘려보내어라.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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