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맛골 사람들 2편ㅡ윤길중, 복덕방의 도장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피맛골 사람들

2편

― 윤길중, 복덕방의 도장




새벽이 골목을 타고 흘렀다.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가 젖어 있었다. ‘급매’, ‘보증금 환불’, ‘철거 공지’. 글자들이 겨울바람에 떨렸다.
복덕방 유리문에는 서릿발이 섰다. 문 안쪽 파란 보온병이 김을 뿜었다. 석유난로가 낮게 울었다. 목재 책상은 물기 먹은 듯 어두웠다. 잉크패드가 말라 있었다. 낡은 도장 자루에 금이 갔다. 장롱 위에 법전이 누워 있었다. 「민법」, 「주택임대차보호법」, 책등이 햇빛에 바랬다. 책장 사이에서 시험노트 한 묶음이 삐져나왔다. 여덟 번의 밑줄. 아홉 번의 붉은 동그라미.

윤길중은 새끼손가락으로 잉크를 풀었다. 잉크가 되살아났다. 잉크 냄새가 난로의 냄새와 섞였다. 그는 도장을 들어 빳빳한 종이 위에 올려보았다. 찍히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소리는 단단했다. 도장면의 홈이 종이에 눌렸다. 이름이 선명했다. 이름은 무게였다. 종이는 사람을 묶었다. 묶인 사람을 골목이 붙들었다.

문이 열렸다.

찬 공기가 들어왔다.

털모자 쓴 노파가 먼저 들어왔다. 손에 봉투를 쥐었다. 봉투는 부풀지 않았다.
“사장 양반, 월세 좀 늦출 수 있나.”
말은 짧았고 눈빛은 오래됐다.
그는 장부를 폈다. 장부의 가로줄이 물줄기 같았다. 세로줄은 울타리 같았다.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칸마다 이름이 있었다.
“할머니, 지난달은 내가 말해놨소. 이번 달은 내가 대신 맞춰볼라요. 담배도 한 보루 내가 넣어둘 테니, 장부에 표시해 두고.”
심숙자 할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담배는 내가 메이커보다 오래 팔았지. 남의 신세는 길게 지면 독이여.”
그는 웃었다. 웃음이 얇았다. 얇은 웃음도 사람을 세웠다.
“그럼 보증금에서 만 원만. 이자 계산은 내가 한다오.”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는 가볍지 않았다.

문이 다시 열렸다.

젊은 부부가 들어왔다.

아이가 껌을 씹었다. 남자는 눈가가 붓고, 여자는 입술이 메말랐다.
“방 좀, 햇빛 드는 데요. 보증금은 작아요.”
그는 지도를 폈다. 손가락이 점점이를 짚었다. 옛날 도시계획도였다. 계획선은 사람의 살처럼 잘려 있었다. 굵은 빨간 줄이 골목의 심장을 가로질렀다. 재개발 구역.
“햇빛은 동쪽, 보증금은 서쪽이오. 둘 다 잡긴 어렵지.”
부부가 눈을 떨구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다방 뒤편 반지하. 겨울엔 바닥이 차고, 여름엔 습기가 오르는 곳. 그러나 창문은 남쪽이었다. 오후엔 빛이 한 번은 들어왔다.
“여긴 어때. 주인 양반이 사람은 괜찮소. 보증금은 내가 깎을 것 같소.”
젊은 부부가 얼굴을 들었다. 빛이 살짝 지나갔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이 느렸다. 숫자는 무거웠다.
“형님. 예, 그 집. 월세 조금만 내려주소. 이 사람 애가 셋이라오. 빈방 오래 두는 것보다 길게 가는 게 좋지 않겠소.”
수화기 너머로 주인의 숨소리가 들렸다. 계산하는 숨.
“그래요. 내가 장부에 적겠소.”
전화를 내려놓고 그는 도장을 찍었다. 종이가 떨었다. 젊은 부부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내려앉는 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안도였다.

아침이 밀려왔다.

전봇대 위 까치가 울었다.

다방에서 커피 냄새가 흘렀다. 복순이가 컵을 닦고 있었다. 눈가의 주름이 움직였다. 그는 사발을 들 듯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길중 씨, 오늘도 장부가 겨울 같네.”
그는 웃었다. 컵받침의 둥근 자국이 겹쳤다.
“겨울 장부가 여름 빚을 막지요.”
복순이가 웃으며 어깨를 쳤다.
“고시 칠 때 그 입심이었으면 벌써 판사였겠지. 골목 판사로 남아줘. 그게 더 잘 어울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안에서 말이 녹았다. 달고 쓰고 뜨겁고 차가웠다. 말은 늘 종이보다 빨랐다. 종이는 늘 말보다 정확했다. 정확한 것들이 사람을 살렸다.

그가 처음 이 골목에 들어왔을 때, 4·19의 함성이 하늘을 긁었다. 플래카드가 펄럭였고, 최루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도서관에서 나왔다. 책상 위에 판례집이 펼쳐져 있었다. 판례는 천천히, 역사는 급하게 넘겨졌다. 학생들의 피 묻은 셔츠가 바람에 나부꼈다. 그는 그 셔츠를 본 뒤부터 판례집의 문장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길게 늘어진 문장 사이로 사람이 빠졌다.
아홉 번째 실패의 날, 비가 왔다. 도시철도역 계단을 오르다 미끄러졌다. 시험장 앞에서 신발이 젖었다. 시험감독이 시계를 가리켰다. 시계는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답안지 위에 이름을 적고 펜을 내려놓았다. 종이는 그의 이름을 받았으나,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뒤, 그는 지하철역 기둥에 등을 기댔다. 복순이가 건네준 커피가 아직 뜨거웠다. 그날 밤 그는 책을 닫았다. 닫는 소리가 크지 않았다. 큰 소리는 언제나 일이 덜 끝났다는 뜻이었다. 작은 소리는 일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는 도장을 잡았다.

도장은 작고, 요령은 컸다.

전세권 설정, 확정일자, 경매 공고, 집행정지, 가처분. 시험 때 외운 것들이 골목에서 살이 붙었다. 법은 책에 있었고, 사정은 사람에게 있었다. 그는 법과 사정 사이에 앉았다. 앉는 자세가 낮았다. 낮게 앉으면 오래 본다. 오래 보면 빠뜨리지 않는다.

정오 무렵, 건장한 사내들이 골목에 들어왔다. 공사모자가 반짝였다. 가슴엔 회사 이름이 달렸다. ‘도시개발’. 상자에서 붉은 페인트를 꺼냈다. 벽에 큰 글씨가 올라갔다. ‘철거’. 자획은 거칠었고, 붓끝은 급했다. 골목의 숨이 잠깐 멈췄다. 아이가 신문가방을 메고 달리다가 멈춰 섰다. 종이 새가 가방에서 얼굴을 내밀었다가 들어갔다.
반장이 나타났다. 김철희. 안전모에 담배를 꽂았다. 눈빛은 마르고 반짝거렸다.
“여기, 일주일 뒤면 들어옵니다. 이주 협의는 구청에서.”
말은 짧고 단단했다. 단단한 말 뒤에는 보상표가 있었다. 표의 숫자는 막대자처럼 곧았다. 막대자는 사람을 대충 맞췄다. 사람의 길이는 제각각인데 표는 길고 직선이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복덕방을 채웠다. 욕설, 통곡, 계산, 묵직한 침묵이 한 방에 섞였다.
“길중 씨, 이 표가 사람을 죽인다.”
복순이가 문턱에서 말했다. 반장의 어깨가 움직이지 않았다.
윤길중은 장부를 덮고 벽의 지도를 떼어왔다. 못 자국이 벽에 남았다. 지도 위 빨간 선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반장, 여기는 노인 혼자 사는 집, 여기는 아이 셋, 여기는 가게 세 내놓고 버티는 집. 동일 단가를 칠 수는 없소.”
반장이 코웃음을 쳤다.
“법대로.”
그는 조용히 책장 위 법전을 내려놓았다. 「주거 이전비」, 「이주대책 기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다.
“법대로면, 한 달 더. 사정대로면, 세 달. 법에는 사정이 없고, 현장에는 사정만 있소. 사이를 좀 열어주시오.”
반장이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려다 주머니로 넣었다.
“사장님, 누구 편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장을 닦았다. 닦인 도장면에 빛이 갔다.
“나는 도장 편이오. 찍힌 대로 가야 하니까.”
사람들이 웃었다. 웃음 속에 살기가 덜어졌다. 웃음은 방패였다. 방패로 갑옷을 뚫을 수는 없으나, 칼끝을 한 번은 튕겨냈다.

밤이 내려앉았다.

그는 책상 위에 서류를 쌓았다.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서’. 글자들이 말라갔다. 그는 다시 잉크를 눌렀다. 오래전에 외웠던 문구가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보전의 필요성”. “회복할 수 없는 손해”. “긴급성”. 긴 단어들이 골목의 겨울을 밀어냈다.
그는 서울역 근방의 무료법률상담소 번호를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시험 보던 시절 도서관에서 마주친, 지금은 변호사가 된 친구였다. 그 목소리는 계곡의 물 같았다. 차갑고 빠르고, 돌을 감고 흘렀다.
“길중아, 문서 네가 쓰고, 내 이름만 얹자. 내일 오전에 접수해. 집행정지 먼저 받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빈 방에서 끄덕임은 혼잣말과 같았다. 혼잣말은 결심을 지켜줬다.

다음 날 오전,

그는 구청과 법원을 오갔다. 계단이 많았다. 구두 굽에 먼지가 붙었다. 복도에서 변호사를 만났다. 서로 눈인사를 했다. 말은 길지 않았다. 도장이 길었다.
판사의 손이 종이를 넘겼다. 판사의 눈은 바빴다. 바쁜 눈이 문구를 훑고, 사정을 물었다. 그는 짧게 말했다.
“한 달이면, 한 사람은 겨울을 넘깁니다.”
판사의 손이 멈췄다. 판사는 도장을 찍었다. 소리가 낮게 울렸다. 집행정지가 떨어졌다. 종이가 따뜻했다. 그의 손이 약간 떨렸다. 떨림이 지나가자 숨이 길어졌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복덕방으로 몰려왔다. 누군가 떡을 가져왔다. 누군가 소주를 가져왔다. 누군가는 울었다. 누군가는 욕을 던졌다.
복순이가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커피가 흔들렸다.
“길중 씨, 골목이 하루 더 살았네.”
그는 웃었다. 웃음이 길었다. 길어진 웃음 끝에서 그의 눈이 젖었다. 젖음은 부끄럽지 않았다. 오래 말라 있던 눈에 물이 닿았다. 눈은 산다.

김철희 반장이 밤늦게 혼자 들어왔다. 안전모가 벗겨져 있었다. 이마가 반짝였다.
“오늘은 네가 이겼어.”
말이 짧았다. 그는 의자를 권했다. 반장은 앉지 않았다.
“내일은 내가 이긴다. 직장이라는 게 그렇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내일이오. 오늘은 사람 이름이 하나 더 남았으니 됐소.”
반장이 문턱을 넘었다.
“윤 사장, 도장은 공평하더라.”
문이 닫혔다. 닫히는 소리는 두 사람에게 같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는 퇴근의 소리, 다른 사람에게는 당직의 소리.

밤이 깊었다. 난로가 작아졌다.

잉크패드가 마르기 시작했다. 그는 시험노트를 펼쳤다. 노트 여백에 적힌 문장들이 빛을 잃지 않았다. ‘정의는 느리다. 느린 정의가 사람을 놓친다. 놓치지 않으려면 가까이 앉아야 한다.’
그는 노트를 접어 장롱 깊숙이 넣었다. 장롱 문이 닫혔다. 닫힌 문 뒤에서 오래된 꿈이 샜다. 꿈은 열이 없었다. 열이 없는 꿈은 아프지 않았다. 아프지 않으니 오래간다. 오래가는 것이 때로 사람을 지키기도 한다.

다음 주, 집행정지의 기한이 끝나갈 때쯤, 구청 회의실에 둥근 탁자가 놓였다. 의자 다리가 삐걱거렸다. 보상표가 다시 펼쳐졌다.
그는 한 줄 한 줄에 사람 이름을 붙였다. 주소 옆에 사정을 붙였다. ‘심숙자. 단칸. 독거. 좌판.’ ‘복순. 다방. 병. 소액 채권 다수.’ ‘정상일. 하수구. 수입 불안정. 형님 병수발.’
공무원이 고개를 들었다.
“이건 공식 절차가 아닙니다.”
그는 웃었다.
“인생은 공식 절차가 아닌 게 더 많소.”
사람들이 낄낄댔다. 웃음이 벽을 넘어갔다. 반장도 고개를 숙였다. 보상표의 숫자 몇 개가 움직였다. 움직이는 숫자 뒤에서 몇 사람이 겨울을 넘었다. 계절 하나를 건너자, 숨 하나가 길어졌다.

그 사이에도 그는 일상을 놓치지 않았다. 새벽마다 좌판 노파의 장부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오후에는 젊은 부부의 집 보일러를 점검했다. 저녁에는 방 세 놓는 할아버지의 단팥빵을 받아먹었다. 단팥이 손가락에 묻었다. 그는 그것을 입으로 훑었다. 달았다. 단 것 하나가 겨울 저녁을 견디게 했다.

어느 날, 낡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서류봉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눈동자가 마르고, 입술이 벗겨졌다.
“사장님, 아들 학교에서 보증금 조금만 급히 필요하다 해서… 계약금을 내일로 미루면 안 될까요.”
그는 장부와 달력을 번갈아 보았다. 달력의 빨간 동그라미가 멀었다. 그는 잠깐 침묵했다. 장롱에서 노트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서랍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냈다. ‘예비보증’. 골목의 비상금.
“여기, 다 갚을 필요는 없소. 대신 아들 졸업식 날, 사진 한 장 가져오시오. 액자에 넣어줄라요.”
남자는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았다. 눈에서 물이 흘렀다. 말이 찢어졌다. 그 말은 장부에 적을 필요가 없었다. 장부에 적지 않은 것들이 더 오래 남았다.

봄이 왔다.

재개발의 포클레인이 골목으로 들어왔다. 공사가 시작됐다. 집들이 무너졌다. 자갈과 먼지가 하늘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이사를 갔다. 누군가는 타지로, 누군가는 같은 구의 끝으로. 가게의 간판들이 떼어졌다. 간판 뒤 벽의 옛 글씨가 나왔다. ‘쌀국수’, ‘간이약방’, ‘문방구’. 오래된 글씨들이 햇빛을 잠깐 만났다. 빛은 그것들을 알아보는 틈을 주었다가, 다시 사라지게 했다.

복순이 다방은 마지막까지 섰다. 창문에 금이 갔다. 커피 냄새는 여전히 났다. 그는 그 냄새를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다방 문 닫는 날,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국밥집 사장이 모자를 벗었다. 다방의 마지막 잔이 돌았다. 잔은 가볍지 않았다.
복순이가 말했다.
“길중 씨, 골목에도 졸업식이 있네.”
그는 조용히 웃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장롱의 노트가 생각났다. 골목이 그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이 오기 전, 복덕방 유리문이 갈라졌다. 균열은 새처럼 퍼졌다. 그는 손바닥으로 균열을 눌렀다. 눌렀다고 멈추지 않았다. 유리는 자기 길을 갔다. 그는 새 유리를 주문했다. 새 유리가 오기 전까지 종이를 붙였다. 종이에는 붉은 글씨로 ‘영업’이라고 적었다. 글씨가 웃겼다. 지나가던 아이가 종이를 두드렸다.
“아저씨, 영업은 계속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살면 영업이요.”

가을이 되어 철거 구역 한편에 작은 공터가 남았다. 공터 옆에 컨테이너가 놓였다. 복덕방의 간판이 그 위에 올라갔다. 간판이 낮아졌다. 하늘은 여전히 높았다. 그는 새로 칠한 도장을 손으로 쓸었다. 도장의 표면은 매끈했으나, 손바닥의 굳은살이 요철을 만들었다. 매끈한 것과 거친 것이 만나는 자리에서 이름이 또렷해졌다.

저녁이면 그는 지도에 핀을 다시 꽂았다. 핀 머리가 별처럼 반짝였다. 별 하나가 다른 동네로 갔다. 별 하나가 도시의 끝으로 밀려났다. 별 하나가 다시 골목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별은 밝지 않았다. 그래도 불은 불이었다. 불이 있는 곳은 길을 가늠할 수 있었다.

어느 밤, 그는 장롱을 열었다.

시험노트를 꺼냈다. 노트는 가볍지 않았다. 종이는 가벼운데, 노트는 무거웠다. 그는 노트를 덮어 복덕방의 기둥 밑에 넣었다. 기둥은 책보다 오래 선다. 오래 서는 것들이 사람을 버티게 한다.
그는 난로를 끄고 유리문을 닫았다. 문에 붙인 ‘영업’ 종이가 흔들렸다. 흔들림은 계속이었다. 흔들리면서 선다. 서면서 또 흔들린다.

복순이가 그에게 작은 봉투를 건넸다.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소년이 졸업가운을 입고 웃고 있었다. 남루한 집 앞 계단, 착 달라붙은 운동화, 반짝이는 눈. 뒤편에 컨테이너 복덕방 간판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날 빌려준 봉투, 그 집 아들이 보냈어.”
그는 사진을 들고 오래 봤다. 사진 속 아이의 웃음이 유리문에 비쳤다. 서릿발이 그 웃음을 흐리게 하지 못했다.
복순이가 말했다.
“길중 씨, 그 도장은 사람을 살리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지. 도장은 그걸 기록할 뿐.”

겨울이 다시 왔다.

골목의 숨이 짧아졌다. 컨테이너 벽이 찼다. 석유난로가 작은 불을 품었다. 장부의 빈칸이 조금 넓어졌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이 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그는 그 사이에 앉아 도장을 닦았다. 도장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낯설지 않다는 건 오래 봤다는 뜻이었다. 오래 본 것만 믿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김철희 반장이 다시 왔다. 손에 작은 상자를 들었다.
“훈장 아니다. 재개발 기념품도 아니다. 우리 현장 사람들이 모은 거야.”
상자 안에는 작은 도장이 있었다. ‘윤길중’.
“네 도장은 공평해서, 우리도 살았다.”
그는 상자를 닫았다. 웃음이 얇고 길었다.
“반장, 도장은 공평하지 않아요. 공평한 척을 하지.”
둘이 웃었다. 웃음은 늙지 않았다. 늙지 않는 것이 사람을 붙든다.

밤이 깊자, 그는 마지막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소리가 방 안에서 울렸다. 울림이 천장에 닿았다가 내려왔다. 도장면의 홈이 종이 깊숙이 박혔다. 박힌 자리에서 잉크가 마르기 시작했다. 마르는 동안 시간이 지나갔다. 시간은 항상 잉크가 마르는 속도로 흘러갔다. 적당히 빠르고, 적당히 느렸다.

문밖에서 바람이 울었다.

울음은 길었다. 울음이 끝나면 새벽이 온다. 새벽이 오면 복덕방 유리문에 서릿발이 선다. 서릿발은 지워진다. 지워지면 또 선다. 그 반복이 골목을 살린다. 그는 그 반복 속에 앉아 있다. 앉아서 이름을 듣는다. 이름을 적는다. 도장을 찍는다. 찍힌 이름이 서로를 붙든다. 붙든 이름들이 골목을 버틴다. 골목이 도시의 허리를 받친다. 도시가 흔들려도 허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는 안다.

아홉 번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었다. 골목이 그를 시험했고, 그는 합격했다. 합격증은 없다. 축하 화환도 없다. 대신 사람들이 있다. 노파의 장부, 젊은 부부의 보일러, 소년의 졸업사진, 철거 반장의 도장. 그것들이 그의 교과서다. 그것들이 그의 판결문이다.

난로의 불이 잦아들었다.

그는 보온병을 비웠다. 뜨거움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도장을 장롱 속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도장은 꼭 장롱에만 있지 않았다. 사람의 손에 있을 때, 도장은 살아 있었다.
그는 유리문 위의 종이를 펴 붙였다. ‘영업’. 글자가 밤에 선명했다. 밤이 깊을수록 선명했다. 선명한 것은 늘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드러난 것들이 오래 남았다. 오래 남은 것들이 내일을 붙들었다.

새벽이 왔다.

신문가방을 멘 아이가 골목을 달렸다. 종이 새가 주머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가 지나가며 외쳤다.
“아저씨! 오늘도 영업!”
그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그 말은 짧았다. 짧은 말이 멀리 갔다. 멀리 간 말이 사람을 불렀다. 불려 온 사람들이 서로를 만났다. 만난 사람들이 장부의 칸을 채웠다. 칸이 채워질 때마다 그는 도장을 찍었다. 찍을수록 잉크는 옅어졌고, 옅어질수록 글자는 또렷해졌다. 사람의 이름이 그러했다. 단단히 눌러 찍으면 오래 남았다. 오래 남는 이름은 골목을 지켰다. 골목을 지키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그는 그 일을 오늘도 했다. 내일도 할 것이다. 내일의 도장 소리가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르지 않음이 사람을 안심시켰다. 그 안심 위에 도시가 걸터앉았다. 흔들리면서도 버티는 도시였다. 그 도시에 피맛골이 있었다. 피맛골 한복판에 복덕방이 있었다. 복덕방 한가운데, 윤길중의 도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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