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제1회 전국어린이 직지 동시대회 대상
쇠로 찍은 미래
서현초등학교 4학년 이유정
바람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흥덕사지 돌바닥은 알고 있다.
불은 뜨겁고 생각은 무거웠다.
사람들은 쇠로 글자를 깎고 지식을 눌렀다.
금속활자.
작고 단단한 네모 그 안에 담긴
천 개의 눈, 만 개의 마음
종이 위에 찍힌 순간 시간이 움직였다.
그 작은 책 한 권
먼 나라로 흘러가
유네스코 기록유산이 되었다.
나는 오늘 고인쇄박물관에서
그 쇠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움직이지 않지만 나를 흔든다.
과거에서 미래를 찍고 있었던
그때 그것처럼
■
시간의 심장에 새긴 문장
– 이유정 어린이의 「쇠로 찍은 미래」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를 읽는 내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이토록 단단한 언어로 활자의 역사와 인간의 정신을 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쇠로 찍은 미래」는 단순한 ‘동시’가 아니다. 역사와 기술, 정신과 시간의 문명이 언어 안에서 다시 활자를 찍듯 재현되는 문학적 현장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직지심체요절』은 단순한 금속활자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지식의 물리적 보존이 아니라, 시간과 정신을 전하는 기계적 도약이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문명사의 한 장면을,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시로 풀어낸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이유정 어린이의 동시 「쇠로 찍은 미래」는 간명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지닌 작품으로, 언어의 울타리 안에 기술, 역사, 시간, 감정을 모두 담아냈다.
이 시는 “바람은 말이 없었다”는 조용한 진술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내 “흥덕사지 돌바닥은 알고 있다”는 문장이 뒤따른다. 말없는 존재들, 그러나 모든 시간을 기억하는 사물들을 등장시키는 이 시작은 이미 철학적이다. 역사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 시는 한 문장으로 꿰뚫는다.
이윽고 시인은 활자의 본질로 시선을 옮긴다.
" 작고 단단한 네모 그 안에 담긴
천 개의 눈, 만 개의 마음"
이 네모난 쇠덩어리, 금속활자 하나가 단지 글자를 찍는 도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담고 있다는 깨달음은 놀랍다. 지식의 전달을 넘어, 감정과 시대의 감각까지 새겨 넣은 물리적 매개체로서의 활자를 어린 시인은 정확히 보고 있다. 이는 단순한 박물관 관람을 넘어선, 감각과 통찰의 문학적 결실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구절이 등장한다.
"종이 위에 찍힌 순간 시간이 움직였다."
이 한 줄은 동시라는 장르를 넘어, 문명과 기록, 인류의 진보에 대한 시적 정의를 제공한다. 기록은 시간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강력한 인식인가. 단 한 줄로, 금속활자가 가져온 역사적 의미를 이토록 정확히 포착한 시를 본 적이 드물다.
후반부에서 시는 더욱 깊은 정서로 나아간다. 박물관의 활자를 바라보며, 시인은 “움직이지 않지만 나를 흔든다”라고 고백한다. 비활성 상태의 금속활자가 내면을 흔든다는 이 감각은, 정지 속의 감동, 침묵 속의 진동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과거에서 미래를 찍고 있었던
그때 그것처럼"
이라는 시구에서, 시인은 역사적 사물이 미래를 향해 다시 호흡하고 있다는 통찰로 시를 마무리한다. 이 한 줄에는 과거에 존재했던 기록 기술이 단지 그 시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우리를 위한 선택이었고, 미래의 나를 깨우는 울림이 될 수 있다는 사유가 담겨 있다.
이유정 어린이의 시는 잘 쓴 시를 넘어서 시간과 사물, 기술과 마음을 연결하는 짧은 인문학적 선언이다.
글자라는 것, 쇠로 깎아 만든 인류의 작은 도구 안에 천 개의 눈과 만개의 마음을 본다는 것은, 단지 시적 감수성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깊은 태도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글자를 읽고, 쓰고, 인쇄된 문장을 소비한다. 하지만 그 글자들이 어떻게 시간의 벽을 넘어 존재해 왔는지를 묻는 사람은 드물다. 이 시는 그런 질문을 가장 맑고 선명한 언어로 다시 우리 앞에 내놓는다.
쇠로 찍은 것은 종이 위의 잉크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정신의 흔적이었다.
움직이지 않지만 우리를 흔드는 그것,
그것이야말로 ‘글자’이며,
‘기록’이며,
‘문명’의 숨결이다.
이처럼 깊은 통찰을 품은 시를 써낸 이유정 어린이는 한 편의 시를 통해 시간과 역사, 기술과 감정을 오롯이 꿰뚫어 보는 시적 감수성과 사유력을 보여주었다. 언어는 작지만 시선은 넓고 깊다. 이 시인에게서, 문명의 흐름을 문학으로 꿰는 미래의 거장다운 단단한 발걸음이 느껴진다.
앞으로의 문학 세계에서 이유정이라는 이름이 더욱 빛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미 그녀는, 어린이 문학을 넘어 한국 문학의 미래를 조용히 찍고 있다.
ㅡ 청람 김왕식
□ 제1회 전국어린이직지동시대회 대상 수상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