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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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길
청람 김왕식
전쟁이 났다.
가까이서 총성이 들려왔다. 땅이 떨렸다. 마을 사람들은 급히 모두 짐을 꾸렸다. *나도 마루에 걸린 자루를 꺼내 아내와 함께 옷가지와 쌀 한 됫박을 쓸어 담았다. 아이들이 울었다. 딸애는 엄마 치마를 붙잡고 울부짖었고, 어린 아들은 눈만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떠나야 했다. 내 발걸음은 외양간 앞에서 멈췄다. 새끼를 뱃속에 품은 암소가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외양간 문을 열었다 닫았다. 소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부푼 배가 꿈틀거렸다. 손끝이 목덜미를 쓰다듬을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마루 기둥 밑에는 누렁이가 목줄에 묶여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꼬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무지 속에 더 깊은 충성이 있었다. 나는 손으로 녀석의 목을 쓸어내렸다. 누렁이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곧 돌아오마.” 나는 속삭였다. 그 말이 거짓임을 내 심장이 알았다.
닭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닭들은 모이를 쪼아댔다. 세상이 불타도 모이를 쪼을 것이다. 나는 닭장 문을 붙잡았다 놓았다. 전쟁 속에서 닭들은 내 손에서 흘러나가야 했다.
마당 끝에 80 노구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다리를 쓸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부축해 함께 가자고 했다. 아버지는 손을 내저었다.
“나는 다 살았다. 너희만 가거라.”
그 말은 단호했다. 눈빛은 맑았다. 죽음을 향한 체념이 아니라, 살아야 할 우리를 밀어내는 힘이었다. 나는 더 붙잡지 못했다.
아버지의 무릎에 누렁이가 얼굴을 묻었다. 꼬리를 흔들었다. 아버지는 힘없는 팔로 개의 목을 감쌌다.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외양간에서 암소가 울었다. 긴 울음이 새벽하늘로 치달았다. 배 속 송아지가 뒤척였다. 소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내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아이들이 그 울음을 따라 울었다. 나는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뒤돌아보면 발걸음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피란길은 산 너머로 이어졌다. 흙길은 험했고, 짐은 무거웠다. 아이들은 울음을 토해냈다. 아내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포성이 울리자 발걸음을 떼야했다. 마을은 검은 연기에 삼켜졌다. 외양간과 닭장, 마루와 울타리, 아버지와 누렁이, 암소와 닭들, 그 모든 것이 불길 속에 묻혔다.
사람들은 침묵했다. 울음은 목구멍에서 돌덩이처럼 굳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살아야 하므로, 울 수 없었다.
밤마다 나는 아버지의 손짓을 떠올린다. 누렁이의 눈빛, 암소의 울음소리가 귀를 친다. 아내는 아이들이 잠든 뒤 혼자 울었다. 그러나 그 울음은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전쟁은 눈물조차 빼앗았다.
나는 알았다. 전쟁은 총칼로만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전쟁은 떠나는 발걸음마다 죽음을 묻는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버린 자들의 죽음을 등에 지고 가는 일이다.
세계 어디서든 전쟁은 똑같은 풍경을 남긴다. 남겨진 짐승의 울음, 늙은 아버지의 손짓, 떠나는 발걸음의 무거움. 돌아오겠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 거짓을 말해야 살아남는다.
전쟁은 지나갔다. 그날의 풍경은 내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암소의 울음, 아버지의 손짓, 누렁이의 꼬리, 아이들의 울음소리. 그것들은 세대를 넘어 내 아이들의 가슴에도 남았다.
그것이 전쟁의 참상이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남긴 가장 깊은 상처다.
오늘도 그날의 울음을 듣는다.
* 어린 시절 우리 동네 달삼 아저씨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