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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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를 아프게 한다
청람 김왕식
책은 늘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라 여겨졌다. 어떤 날은 책이 나를 아프게 한다.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속 깊은 상처가 불쑥 드러나고,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책이 주는 고통은 칼끝처럼 날카롭지 않다. 오히려 은근히 스며들어 오래 앓게 만드는 통증이다.. 그 아픔은 나를 무너뜨리기보다 외려 다시 세우는 힘을 품고 있다.
책 속의 문장은 나를 향한 거울이다. 문학 속 인물의 고독은 나의 고독을 불러내고, 그들의 상처는 내 상처의 형태를 닮아 있다. 읽는 순간, 타인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가 된다. 아픈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책은 나를 타인의 삶 속으로 밀어 넣고, 그 속에서 내가 감추었던 얼굴을 발견하게 한다. 나를 마주하는 순간의 고통은 피하고 싶지만, 동시에 가장 정직한 치유의 시작이기도 하다.
철학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아프게 한다. 날카로운 질문들이 가슴을 찌른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변명할 수 없다. 책장은 무심히 넘어가지만, 문장은 내 양심을 붙잡아 흔든다. 아픔은 불편함에서 오고, 불편함은 성찰로 이어진다. 결국 책은 나를 괴롭히는 동시에, 더 나은 나로 이끄는 교사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공동의 상처가 내 것이 된다. 전쟁, 학살, 억압의 기록 속에서 나는 결코 그 시대를 살지 않았음에도 눈물이 고인다. 책이 열어준 과거의 장면들이 마치 나의 경험처럼 다가오기에, 아픔은 더욱 선명하다. 그 아픔 덕분에 나는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함을 배운다. 책이 건네는 상처는 결코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책임의 자국이다.
책이 주는 아픔은 또한 성장의 증거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던 문장에서 어느 날 불현듯 가슴이 저려온다면, 그것은 내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더 예민해졌고, 더 깊어졌으며, 더 사람다워졌음을 뜻한다. 책은 늘 같은 문장을 건네지만, 그 문장을 받아내는 나의 마음이 변한다. 아픔은 그 변화를 알려주는 신호다.
책이 나를 아프게 할 때,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고통 없는 깨달음은 공허하고, 상처 없는 성장은 얕다. 책은 나를 울리고 흔들어 무너뜨리지만, 그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법을 가르친다. 책의 아픔은 끝내 축복이다.
결국 책은 상처를 건네는 동시에, 상처 위에 새로운 살을 돋게 한다. 읽으며 눈물 흘리고, 마음이 무거워도, 다시 책을 펼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픔을 통해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따뜻해지며, 조금 더 나답게 살아간다. 책이 나를 아프게 할수록, 나는 더 깊이 살아간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