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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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나를 업신여겼다
지하철역의 엘리베이터 앞은 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하다. 평소 같으면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택했을 것이다. 오늘은 시간이 바빠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몇 명이 함께 탔는데, 문이 닫히려는 순간 멀리서 휠체어를 탄 분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기다려주었다. 조금 늦더라도 함께 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휠체어를 탄 그는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기다려주지 않고 그냥 내려가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순간 당혹감이 엘리베이터 안을 채웠다. 사실 누구도 그런 의도가 없었다. 이미 타고 있던 이들은 분명히 기다려주었고, 공간도 충분히 비워두었는데, 오해가 생긴 것이다. 옆에 있던 중년의 여성이 차분히 설명하려 했다. “우리가 기다려드린 겁니다. 왜 그러십니까?”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그 분은 여전히 격앙된 어조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은 나를 업신여겼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무도 그를 업신여긴 적이 없는데, 그의 상처받은 마음은 이미 벽처럼 닫혀 있었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은 더 좁게 느껴졌다. 몇 초의 시간이었지만, 그 공간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괜한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배려가 왜곡되어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은 복잡한 혼란에 휘말린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더 큰 소리로 반박하지 않았다. 혹여 상처를 더 깊게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휠체어를 움직여 내리면서 마지막으로 옆에 있던 어르신을 향해 말했다.
“재수 없는 아줌마들.”
차갑게 던져진 그 말은 엘리베이터 안에 남은 이들의 가슴에 오래 울림으로 남았다. 누구도 그 순간 웃을 수 없었다.
이 장면은 단순히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해가 어떻게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지, 상처 입은 마음이 어떻게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장애인이 겪어온 차별과 무시의 경험이 그의 눈빛과 말에 배어 있었을 것이다. 작은 움직임조차 그에게는 모멸로 읽히고, 짧은 기다림조차 무관심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의 격한 반응은 어쩌면 오랜 세월 쌓인 불신의 그림자였다.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억울함도 외면할 수 없다. 분명히 배려했고, 기다려주었으며, 공간을 비워주었는데도 오해로 돌아온 상황은 씁쓸함을 남겼다. 인간관계는 이처럼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할 때 갈등으로 번진다. 이해받지 못한 상처는 공격으로 터져 나오고, 설명하려는 말은 벽에 부딪혀 흩어진다.
이 사건은 결국 묻는다.
참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해받지 못해 억울할 때에도 침묵을 택하는 용기, 누군가의 상처가 불합리하게 내게 흘러올 때에도 그 분노를 되돌려주지 않는 인내, 이것이 참음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오늘의 순간처럼 억울함이 쌓일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반격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반격은 또 다른 상처를 낳을 뿐이다.
삶은 늘 불편함과 오해로 얽혀 있다. 특히 타인의 상처를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난 한 마디, 한 행동이 전부가 아니다. 어떤 이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수없이 무시당한 기억을 품고 있고, 또 어떤 이는 억울한 오해 속에서도 차분히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순간을 살아간다. 이런 삶의 교차점에서 결국 필요한 것은 조금 더 깊은 인내와 더 넓은 이해다.
엘리베이터 안의 짧은 사건은 작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각자 억울했고, 각자 이유가 있었다. 그 순간 누구도 해답을 내지 못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난 뒤 남는 것은 “그때 왜 나는 더 따뜻하게 설명하지 못했을까”라는 아쉬움과, “왜 그는 그렇게까지 상처가 깊었을까”라는 안타까움일 것이다.
삶은 때때로 이런 순간들을 통해 묻는다. 오해와 억울함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침묵과 참음은 억울함을 삼키는 일이지만, 동시에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마지막 지혜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격한 말속에 숨은 깊은 상처를 읽어낼 수 있다면, 우리의 억울함도 결국 더 큰 이해로 녹아내릴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엘리베이터는 하나의 교훈을 남겼다. 배려가 늘 배려로 읽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배려해야 한다.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오해를 사더라도, 언젠가는 그 참음이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전해질 날이 올 것이다. 참음은 곧 희망을 지켜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