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장독대 위 정화수
■
바늘 끝의 비밀과 눈썹의 전설
청람 김왕식
사람마다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무늬가 다르다. 흙먼지, 짚단 연기, 혹은 들길의 풀내음. 내 기억의 무늬는 언제나 바늘 끝에서 번쩍이던 불빛이었다. 불에 달군 바늘을 머리칼에 문지르던 어머니의 손길, 그 광경이 나의 기억을 빚어냈다.
어머니는 늘 바늘을 쥐고 사셨다. 낮에는 옷을 꿰매고 밤에는 병든 가족을 돌보았다. 속이 더부룩하다는 말이 들리면 곧장 바늘을 불에 달구어 머리칼에 문질렀다. 그 순간 퍼지던 치직 소리와 냄새는 어린 나에겐 알 수 없는 의식 같았다. 의학적으로 따지자면 불합리했으나, 결과는 단순했다. 손끝에서 피 한두 방울 떨어지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가라앉았다. 오늘날 말로 하면 플라시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가 편안해진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어머니의 믿음과 손길이 이미 최고의 약이었다.
더 기묘한 풍습은 다래끼 치료였다. 아이 눈이 부어오르면 어머니는 눈썹을 뽑아 돌탑 위에 올려놓고 정화수를 떠 기도했다. 누군가 그 길을 지나 돌탑을 건드리면 병이 옮아간다고 믿었다. 실제로 아이 눈은 나았고, 이웃 아이가 다래끼에 걸리면 사람들은 눈빛만 주고받았다. 원망 대신 웃음 섞인 체념이 이어졌다.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순환한다고 여긴 것이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라는 공동체적 합의 속에서 삶은 이어졌다.
이 풍습은 미신 같으면서도 공동체의 지혜를 품고 있었다. 병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감당하는 방식이었다. 웃음과 풍자는 불안을 달래는 힘이 되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버텼다. 위생적으로는 허술했으나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만큼은 의학이 놓친 영역이었다. 어머니는 바늘로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걷어낸 것이다.
지금은 약국이 코앞이고, 병원 예약은 휴대폰으로 끝난다. 다래끼는 약 한 통이면 낫는다. 그러나 그 옛 풍습은 여전히 그립다. 불에 달군 바늘 끝, 머리칼에서 풍기던 냄새, 돌탑과 정화수의 풍경. 그 허술한 방식 속에 정과 해학이 있었다.
서랍 속 바늘 하나를 꺼내들면, 불에 달구지 않아도 어머니의 손길이 전해진다. 그 바늘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웃음을 꿰매고 아픔을 덜어내던 끈이었다. 민간요법은 미신이면서 동시에 문화였다. 바늘과 눈썹, 정화수가 빚어낸 이야기는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며 사람들을 견디게 했다.
결국 어머니의 바늘 끝은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낫게 했다. 다래끼를 옮기는 의식은 병을 떠넘긴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해학은 미신을 웃음으로 바꾸었고, 웃음은 아픔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 허술함 속의 따뜻한 지혜, 그것이야말로 고향이 남긴 유산이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