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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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박명훈 선생님
청람 김왕식
내일은 참으로 기쁜 날이다.
세월의 강을 건너와도 여전히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날, 사십여 년 전 서울오산고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맺은 인연의 두 분을 뵙는 날이다. 교사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던 시절, 나는 두 분을 만남으로써 교단에서의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가를 배웠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인생에서 가장 귀한 스승은 책 속에서가 아니라 사람 속에서 다가온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 가운데 박명훈 선생님은 나에게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 스승이었다. 같은 국어과에 몸담고 있었지만 나는 늘 그분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모셨다. 스승의 날이면 나의 은사로 정성껏 꽃을 달아드렸다.
사제의 정을 넘어, 삶을 향한 깊은 존경이 그 마음속에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했으나 음운론을 비롯한 문법 쪽에서는 빈틈이 많았다.
교사라 하기에는 부끄러운 부족함이었지만, 그 부끄러움은 나의 배움의 문을 열게 했다. 나는 선생님을 찾아가 수년 동안 질문을 이어갔다. 마치 학생이 되어 묻고, 다시 받아 적고, 또 되묻는 일을 반복했다.
그 모습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선배 동료 교사가 나를 따로 불러 세웠다.
“동료 교사에게 배운다고?
학생들이 알면 함부로 대하지 않겠느냐.
자존심도 없느냐.”
그의 말은 날카롭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존심은 허물어질 수 있어도, 배움은 허물어질 수 없었다.
외려 나는 그 꾸지람 속에서 배움의 길을 더 굳게 걸었다. 스승은 나이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의 깊이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배움은 결국 내 삶의 길을 바꾸어 놓았다. 세월이 흘러, 방송강의 업체에서 강의 제안을 받은 것도 그때의 공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여전히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힘 역시 그때 쌓은 땀과 겸허에서 비롯되었다. 교단은 나의 삶의 자리였고, 그 뿌리에는 언제나 스승의 손길이 있었다.
박명훈 선생님은 대학 시절 청록파의 거목, 조지훈 시인의 제자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문학적 안목은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시의 맥락을 짚어내는 눈빛은 번뜩였고, 설명은 물처럼 맑았다. 그러나 그의 빛은 단지 학문적 실력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그 인품이 더없이 고결했기에, 학문은 사람을 향한 울림으로 이어졌다. 선생님은 늘 온화했고, 상대방의 부족함을 책망하기보다 길을 열어주었다. 덕망과 품격, 그 속에 문학의 진정한 힘이 살아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의 음악 사랑이었다. 고전 음악에 대한 깊은 조예는 그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국어와 시문학을 강의하실 때에도 클래식 선율의 정갈함이 깃든 듯, 말끝에는 언제나 울림이 남았다. 마치 글과 음악, 삶과 학문이 하나로 어우러져 선생님 안에서 하나의 교향곡처럼 울려 퍼지는 듯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목소리 속에는 여전히 따뜻한 결이 있었다.
"김 선생, 보고 싶네.”
그 짧은 말은 긴 세월을 건너뛰어 나의 마음을 적셨다. 그러나 그 목소리 속에는 세월의 그늘도 배어 있었다. 사모님께서 치매로 수년째 병환 중이라 직접 돌보고 계시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한평생의 반려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는 그 모습은, 교단에서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가르침과 배려, 헌신과 사랑은 그분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직접 찾아뵈어야겠다고. 서울 오산고 시절 절친했던 문재용 선생과 함께, 선생님 댁 근처 공릉역에서 뵙기로 했다. 두 분을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두근거린다. 설렘은 나이를 묻지 않는다. 청년 시절 첫 강단에 섰을 때의 떨림이, 오늘도 다시 살아난다.
돌아보면, 인생은 결국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그 만남이 때로는 나를 세우고, 때로는 나를 바꾸며, 때로는 나를 구원한다.
박명훈 선생님과 문재용 선생님, 두 분은 나의 교직 인생을 지탱해 준 기둥이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였으나, 그 작은 존재를 귀히 여기며 길을 내어주셨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 한 인간이 또 한 인간에게 남긴 빛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내일은 그 빛을 다시 만나는 날이다. 가슴이 설렌다. 세월은 흘러도, 인연은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세월이 더해질수록 그 인연은 깊어지고, 은혜는 더 선명해진다. 인생이란 긴 항해에서, 나는 두 스승을 만남으로써 나침반을 얻었다. 내일, 그 나침반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의 옷깃을 여민다.
문학을 가르치는 일이 결국 사람을 가르치는 일임을, 두 분은 몸으로 보여주셨다. 학문은 책 속에 있지만, 지혜는 사람 속에 있다. 나는 그 지혜를 오롯이 받은 빚진 자다.
내일,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감사로 돌려드리고 싶다. 오랜 세월 흘러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계신 두 분을 뵙는 일은, 내 삶에서 가장 기쁜 날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ㅡ청람 김왕식
□ 박명훈 선생님
□ 서울 오산고등학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