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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광일 시인의 '초승달' ㅡ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초승달


시인 주광일




해 질 녘 서쪽 하늘을
홀로 지키는
초승달이여
그대 모습
참 맑고 초연하구나
언제나 정겨운
그대 모습
보고만 있어도 좋구나
한평생 통회하는
그대 모습
보면서 비로소 나는
나를 잊을 수 있구나





주광일 시인의 '초승달'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주광일 시인의 '초승달'은 노년의 시선으로 바라본 서쪽 하늘의 달빛을 통해 자기 존재를 관조하고, 한평생의 삶을 성찰하는 깊이를 담아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단순한 자연 묘사에 머무르지 않고, 초승달이라는 맑고 초연한 상징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내면을 정화시키는 길로 나아간다.
법조인으로 살아온 시인의 삶의 철학과 미의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작품은 곧 작가의 생애와 하나로 겹쳐진다.

작가는 한평생 법조인으로서 정의를 지키며 살아왔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그저 법률적 판단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 사회 속에서 바른 길을 밝히고자 한 실천적 가치라 하겠다. 그런 삶의 결은 시에서 초승달의 맑음과 겹친다. 세속적 욕망이나 어지러운 분쟁을 벗어난 초승달의 모습은, 오랜 세월 청렴과 곧음을 잃지 않고 살아온 작가의 정신적 자취를 닮았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초승달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다. 이는 단순한 노년의 체념이 아니라, 한평생의 고투 끝에 도달한 관조의 자리이다.

이 시의 언어는 군더더기 없이 맑고 단아하다. “참 맑고 초연하구나 / 언제나 정겨운 / 그대 모습”과 같은 구절은, 그 자체로 이미 달빛처럼 투명한 울림을 지닌다. 시인은 초승달을 ‘정겨움’으로 표현하며, 자연의 차가운 빛에 따뜻한 감정을 부여한다.
이는 노년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계가 이미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 전체를 감도는 초연한 분위기는 바로 이러한 정서적 심화에서 비롯된다.

“보면서 비로소 나는 / 나를 잊을 수 있구나”라는 종결부는 이 시의 핵심이다. 자기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곧 에고의 굴레를 벗어나 더 큰 존재 질서와 하나 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망각’은 단순한 기억의 소멸이 아니라, 자기 집착의 해체이자 자유의 회복이다. 달빛을 매개로 한 이 초월적 망각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도달하는 성숙한 영혼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삶의 철학이 결국 인간 본연의 겸허와 무아의 지점으로 귀결됨을 보여준다.

이 시는 노년의 쓸쓸함이나 허무가 아니라, 내려놓음에서 오는 품격과 고요한 충만을 드러낸다. 서쪽 하늘에 홀로 떠 있는 초승달은 인생의 석양과 겹쳐지면서도, 그 빛을 통해 아직도 맑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발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신의 노년을 단순한 쇠퇴가 아닌 관조와 성찰의 시기로 제시한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작품 세계가 지닌 미학적 가치이다.

주광일 시인의 '초승달'은 한 사람의 삶과 정신이 응축된 시편이다. 파사현정의 길을 걸으며 청렴하게 살아온 이가, 이제 초승달을 통해 자기 자신을 비우고 관조하는 단계에 이른다. 언어는 간결하되 맑고, 정서는 단아하되 깊다.
결국 이 작품은 노년의 성숙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한 편의 삶의 철학이며, 동시에 존재의 본질을 성찰하는 미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초승달의 초연한 빛은 곧 작가의 생애와 맞닿아, 독자에게도 ‘나를 잊는 순간의 자유’를 체험하게 한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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